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저서나 자서전을 남기지 못했고, 평양에서 직접 작성했던 설교와 각종 문서들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당시 성도들과 가족의 증언뿐이다. 한국 순교자의 자취를 전하는 데 힘써 온 유승준 작가는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인 주광조 장로의 어린 시절을 복기한 친필 원고와 육성 자료, 당시의 사실적 증언들을 토대로 <나의 아버지 주기철>을 집필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신약성경의 첫 권인 마태복음 1장은 족보로 시작된다. 구약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 이들에게서 자손이 태어나 인류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인류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그에게서 핏줄이 이어져 가문을 이루며 그 가문을 통해 한 시대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쓰이는 것,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생에 관여하신다”고 했다.
이어 “‘주현성은 이규련에게서 3남 2녀를 낳았고, 사별 후 조재선과 재혼하여 주기철을 낳았다. 주기철은 안갑수에게서 네 아들을 낳았는데 영진, 영만, 영해 그리고 광조가 그들이다.’ 주기철의 족보를 성경체로 쓴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로써 주광조는 주기철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이것의로 그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의 인생 향배가 결정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산학교에서 유영모, 이승훈, 조만식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주기철은 졸업 후 실용적인 노선을 택해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예수교대학 상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힘 있는 나라, 잘사는 조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청년 주기철의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안질이 심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학기 만에 대학 생활을 업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17년 10월, 스무 살 나이에 세 살 아래인 안갑수와 혼례를 치른다. 그녀 역시 김해읍교회에 다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가 웅천읍교회에서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던 1919년 10월 큰 아들 영진이 태어났다. 이 무렵 주기철은 마산 문창교회와 웅천읍교회 사경회를 통해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거듭난 후 병세가 호전됨에 따라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해 목회 활동을 시작한 1927년 11월에는 셋째아들 영해가 태어났으며, 두 번째 목회지인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간 직후 1932년 3월 막내아들 광조가 태어났다. 주기철은 아들 이름에 모두 사용했던 돌림자인 ‘펀얀할 영’ 자를 쓰지 않고 유독 막내 이름안 ‘광조’라고 지었다. 이는 나라를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이름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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