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죽음 같은 감옥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거듭된 실패로 무인도 같은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곳에 갇혔던 빠삐용이 최후의 탈출을 시도한다. 코코넛 잎으로 만든 엉성한 자루를 던지고 바다로 뛰어드는데 사투를 벌이던 주인공이 “나 아직 살아있다”(I’m still here)고 말한 후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는 내레이션(narration)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자유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뭔가? 프랑스인들이 봉건 군주들과 투쟁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것도, 미국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도, 그리고 흑인들이 종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것도 죄다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 왔던 자유, 지금도 그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독립 당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Give me liverty, or give me death)고 했는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언하셨다.
자유, 죄가 가로막는다
자유에 대한 욕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지 않느냐는 뱀의 꾀임에 속은 아담과 하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려는 시도였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도 마찬가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자유롭게 살려고 집을 나갔다. 이게 인류의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자유를 얻고 행복했느냐인데 행복은커녕 끔찍한 비인간의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한 죄의 노예가 된 것,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불행에 빠지고 만 것이다.
본문에서도 자유의 욕구가 강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1-32절).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이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36절에서도 반복한 후 예수님은 자신과 진리를 동일시 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 진리 곧 예수님을 알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인터넷과 방송, 신문에 설교가 넘치지만 오늘날 영양실조 걸린 성도가 많지 않나? 왜 그럴까? 골라 먹는 재미 때문일 수 있다. 혹시 맘에 드는 설교만 찾지 않나? 설교는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선포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구속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묻고 싶다. 말은 구속 아닌가? 구속당하지 않으려고 말 안 하며 사나? 또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구속 아닌가? 그게 싫어서 숨 안 쉬나? 진리가 질리게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진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감사한 것은 이 진리가 어떤 비밀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진리를 아는 것,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단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자유, 이 자유는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이 자유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사람이 마르틴 루터다. 루터는 번개에도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 교황과 황제의 권력 앞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발견한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원래 이름인 루더(Luder)에서 이름을 루터(Luther)로 바꾼다. 자유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자유롭다’(32, 33, 36절), 자유는 헬라어로 ‘엘류테로’(ἐλευθερώ)인데 ‘류테’에서 가져온 이름이 ‘루터’다. 루터는 복음 안에서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을 맛보고, 죽음과 그 이후의 심판으로부터의 자유함을 맛보고, 교황의 종교권력이나 세속권력으로부터 신앙이나 양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않는 자유함을 맛본다. 그래서 자유는 종교개혁에서 너무도 중요한 개념, 제한받지 않는 근대 이성의 길이 여기서부터 열렸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현대인의 병 중 가장 심각한 병이 죄에 대한 무의식과 무감각 아닌가? 최고 지도층으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죄에 대한 의식이 없다. 절망이다. 일찍이 19세기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이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오죽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을까? 그런데도 미련한 인간은 가장 위험한 절망이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을 모른다. 키에르케고르는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해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은 아무리 반대 증거를 갖다 대어도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스탈린의 굴락, 폭력, 강간, 학대, 낙태, 고문, 살인 등을 보면 인간은 죄의 종인 것이 분명한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죄가 자유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자유, 예수님이 주신다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난처해하고 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 가발을 찾아준다.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헨델은 너무 고마워서 그 아가씨가 일하는 이발관에 자주 찾아갔고,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그 여인에게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준다. 심지어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도 이발관에 들렀는데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손님의 머리를 만지다가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주세요” 소리쳤다. 헨델은 조용히 그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 불후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백하면 죄를 사해주신다(요일1:8-9). 자유를 주시는 것, 이 자유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사상적 자유 정도가 아니다. 죄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요, 고귀한 피로 값을 치르고 주신 값진 보화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절)며 반발했다.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정치적인 예속상태에 있기는 해도 압제자들로부터 결코 종교적 자유를 빼앗겨 본 적이 없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유대인들, 그들은 자존심과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유를 주신다고? 우리와 무슨 상관인데?” 그런 자세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시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절), 죄를 짓는 사람은 죄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성령의 감화도 받지 못한다는 것, 도저히 죄의 종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은혜 아니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현대라서 살만한가? 왜 사람들은 심한 불안을 느끼고 속박감 속에 살까?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환경은 외부적으로는 안락과 편리함이지만 내면은 부패로 인해 편치 않다. 사람도 아프고 지구도 아플 뿐이다.
1938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 평화 회담이 열렸다. 그때 참석했던 영국 수상 네빌 챔벌레인(Neville Chamberlain)은 “우리 시대에 평화가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후인 1939년 9월 평화 회담에 열렸던 독일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전운에 휩싸였다. 그 이후 세계는 만 번에 가까운 크고 작은 평화 회담을 열었지만 평화를 성취하지 못했다. 죄로 인한 불화는 어떤 정치적, 외교적 노력으로도 평화를 줄 수 없었다. 인간은 기근과 전쟁과 갈등 속에 살고 있다. .
구원자가 필요하다.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롬8:2)라고 선언했다. 은혜받은 스펄젼(Spurgeon)은 “국민 생활의 자유는 가치 있고, 종교의 자유는 귀하나 영적 자유는 지극히 값진 보배”라 했다. 또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지만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했던 쟝 앙리 머르 드아우비그네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유일한 주권이요 완전한 자유”라고 말했다. 자유, 예수님이 주신다.
자유, 믿음으로 누린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 참 자유를 누리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만큼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잘 믿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진리와 자유와의 관계를 한 가문에 매인 종과 상속권을 가진 아들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35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죄의 노예였다.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라 했는데 막연한 것을 기대하는 희망은 중요하기는 해도 우리가 갖는 기대일 뿐, 그래서 불안하다. 하지만 신앙은 확실한 것을 바라보는 것, 인간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논리로 부활이 가능한가? 아니, 부활은 기적일 뿐이다.
우리는 그 기적을 믿는다.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의 실재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여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 이 신앙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절). 출21:2-6과 신15:12-18에 의하면 이스라엘인 노예의 경우 6년 지나면 해방될 수 있고, 또 레25:10에 희년(Jubilee) 제도에 의해 50년이 된 해에 모든 노예들은 해방될 수 있다. 이 기간이 아니더라도 노예들은 친척이나 혹은 본인의 돈으로 속량될 수 있으나 금액이 엄청나 해방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자유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했다. 더 이상 죄의 사슬에 매여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풀어주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망과 죄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 자유는 믿기만 하면 누린다.
1866년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는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까지는 참된 인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청년 작가로서 글 좀 쓴다고 교만하기 그지없던 안하무인(眼下無人), 어느 날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형을 떠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기약도 없는 유형 세월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밤에는 어둡고 추운 골방에서 외로이 자신의 인생을 달래며 지냈다.
그때 누군가가 보내준 성경,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인생 말엽에 온 힘을 다해 작품을 하나 내는데 그게 바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죄와 벌』이라는 명작이다. 성경 말씀으로 거듭난 그는 양심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 번민 끝에 죄 문제를 해결 받은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가 깨달은 구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에 대해 깊이 깨닫고, 그 진리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한번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돈을 잘 벌어야 한다”며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버는지 설교를 통해 그 방법까지 가르쳤다. 그날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와 감동을 받은 남편이 “야, 저 목사 설교 잘한다”라고 한다. 그는 웨슬리가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돈을 잘 모아 부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할 때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저 목사 설교 끝내준다”며 좋아한다. 그런데 웨슬리가 이어서 “그것을 여러분을 위해서 쓰기보다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풍성히 나누며 살아야 한다”라고 하자 그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잡더니 “저 목사, 오늘 설교 죽 썼다!” 그랬단다.
이 세상은 욕심이 너무 많다. 죄악들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 우리도 죄와 무관하지 않다. 모두가 죄 아래 있는 죄의 포로, 큰소리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격 없고 권한도 없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기꺼이 보혈을 흘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게 된 사람, 믿음 안에서 날마다 그 자유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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