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기적 후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지만 예수님의 기대와 다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에 돌아서고, 반대 세력도 늘어났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한다”(1절)는 말로 7장을 시작한다. 7장부터는 예수님의 사역 때마다 반대와 저항이 있었던 것이 거론된다. 그러면서 반대자나 적대자들의 모든 이론이나 주장에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논점에서 충분한 답변이 주어졌다고 변증한다. 칼리 H. 도드(Carley H. Dodd) 교수는 요한복음 7장과 8장을 “가장 격렬한 논쟁의 불꽃이 튀는 곳”이라 했다. 요한이 예수님을 적수들과의 격론을 피하지 않은 분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요한은 절기를 들어 시간을 점찍는 방법으로 복음서를 기록한다. 그래서 ‘명절’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17회나 나온다. 6장까지가 유월절 중심의 전개였다면 7장부터 9장까지의 배경은 초막절이다. 명절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 명절이 ‘기쁨의 잔치’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와 인도받는 것을 하찮게 여겼던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의 배경인 초막절은 광야에서 40년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밤낮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만나를 내려 배를 채워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10월 초쯤에 지킨 메시아 왕국을 소망하는 명절, 유월절, 칠칠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였으며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이자 마지막 절기였다.
예루살렘 근교 약 30㎞ 이내에 살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한 명절, 광야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집밖의 초막에서 지내며, 밤이면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 성전 주위를 촛불로 밝히고, 제사장들은 반석에서 물 내신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실로암의 물을 가져다가 금그릇으로 붓는 의식을 행했다. 불 축제와 물 축제였던 것이다.
워런 W. 위어스비는 7장의 내용을 ‘절기 전’(1-10절), ‘절기 중’(11-36절), ‘절기 끝’(37-52절), 이렇게 세 시기로 구분하며 이 세 기간에 일었던 반응을 절기 전에는 ‘불신앙’(형제들의 불신앙), 절기 중에는 ‘논쟁’(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의 예수님의 인격을 둘러싼 논쟁과 가르침에 대한 논쟁), 그리고 절기 끝에는 ‘분열’(예수님을 두둔하는 사람들과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라는 세 단어로 설명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자기를 대적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대체로 안전한 곳인 갈릴리에 머물며 사역하셨다. 그런데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장남 노릇을 안 하는 형에 대해 불만이 있던 형제들이(마13:55) 기적 행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장남이 망치와 대패는 팽개치고 날마다 사역한답시고 밖으로만 나도는 것에 대한 불만과 피해의식을 표출한다. “유대로 가소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3-4절), 공손한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만약 진짜 메시아라면 갈릴리 촌구석에서 잘난 척하지 말고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에 가서 차라리 정계에 입문하시오”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했다.
때가 되지 않았나?
고대 헬라어로는 시간을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했다. 크로노스가 객관적인 시간,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내 경험 속에 있는 의미 있는 시간, 특정한 일순간이다. 예를 들어 임산부가 태아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귀중한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아이가 1일 되었다고, 100일 되었다고 날마다 며칠째라는 숫자판을 넘긴다. 아이를 낳은 그때가 바로 카이로스인 것이다.
둘 다 신의 이름이기도 한데 크로노스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을 낳은 아버지 신, 그런데 낳는 족족 자녀를 먹어 치운다. 시간이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카이로스 신은 기회의 신, 형상이 특이하다. 앞머리는 털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털이 하나도 없다. 앞머리가 무성하여 붙잡기는 쉽지만 뒷머리가 없기 때문에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어깨와 양발 뒤꿈치에 날개가 달려있는데 기회는 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달아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카이로스 신의 양손에는 저울과 칼이 들려있다. 정확하게 판단하고 단호하게 결정하라는 뜻이다. 카이로스, 그 형상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인생의 결정적 시기를 말한다.
6절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라는 말씀과 8절의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때’가 바로 카이로스, 갑자기 임할 수도 있는 시간이며, 그릇에 물이 차서 넘치는 바로 그 임계점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이게 바로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카이로스, 그때가 언제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카이로스에 대한 이해 충돌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 했고, 예수님은 아직 아니라고 했다. 형제들 입장에서는 초막절이 기회였지만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 피차 생각이 다르다. 형제들은 그 명절을 영광의 때로 생각했고, 예수님은 그때를 고난의 때로 생각하신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1), 십자가를 목전에 둔 예수님의 기도인데 ‘때’는 십자가를 지실 때다.
사람들은 십자가와 고난을 피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 카이로스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카이로스는 상승 기회, 또는 영광을 드러낼 기회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고난과 낮아짐과 죽음, 예수님은 이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으로 참된 생명이 주어진다고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셨다.
주목할 것은 본문에 ‘올라간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는 것이다(10절 등). 예루살렘은 실제로 높은 곳에 있고 또 거룩한 도시, 성도(聖都)이자 수도(首都)이기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표현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라간다’는 것은 신분 상승과 영광을 향한 오름이지만 예수님의 올라감은 다르다. 골고다 언덕의 죽음을 향한 올라감이요, 십자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니 서로가 생각하는 때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이런 오해가 있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서야 할 때라고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2:4)고 하셨다. 사람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으신 것,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래놓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다. 기적을 행하신 거다. 왜?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기적을 통해 영광을 드러낼 때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때를 십자가를 지실 때로 정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안가겠다고 하시고는 ‘은밀히’ 올라가셨다.
카이로스 신이 앞머리가 무성해서 알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카이로스, 그때가 와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또 카이로스를 자신의 결정적 선택이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 같은 것은 전혀 카이로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의 카이로스일 때가 더 많을 수 있다.
요셉이 그랬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갈 때가 그의 카이로스였다. 그게 팔레스틴의 일개 부족 사람이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발판이 된다. 바울도 그랬다. 바울이 예루살렘 주류들에게 밀려났던 그때가 그의 카이로스였다. 안디옥에서 야고보 세력과 베드로와 바나바 일파와의 싸움에서 밀리면서 그리스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변방만 돌아다녔다. 사도행전에서는 단순히 ‘바나바와 헤어졌다’, ‘성령이 막았다’라고 했지만 밀려서 유럽으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바울을 더 넓은 이방 세계의 선교사가 되게 했다. 복음의 비밀을 담고 있는 칭의론(Justification)도 그가 주류에서 밀려나 기득권 세력과 싸우면서 깨닫고 정립한 신학이다. 그러니 안디옥에서 쫓겨나던 그때가 바울의 카이로스였던 셈이다.
이렇게 카이로스는 지나고 난 다음에 알게 된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다. 카이로스를 인식하는 길은 결국 믿음과 사랑이다. 주어진 운명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 믿음, 그리고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 그때 카이로스가 열린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을 카이로스라 판단했기에 “때가 되지 않았나?”하고 나섰던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6절),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D-day로 잡고 있는 명절은 유월절이다. 그런데 초막절?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명절은 위험하기만 한 때다.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그러신다. 야단났다. 그렇지 않아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을 명분이라도 쌓겠다는 건지, 안식일 범했다고 난리인데 절기도 지키지 않는 유대인 남자가 되시겠단다. 그게 걸렸을까?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10절) 절기 날짜에 맞춰서 조심하며 올라가셨다.
요한복음에서 이번 여행은 세 번째 예루살렘 여행,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 여행이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이다. 이때부터 유월절까지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는 예루살렘이다. 그러면서 요단강이나 그 주변을 여행하기도 하셨다. 위험하다고 은밀히 들어가셨지만 그래도 안전했던 이유는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때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말씀이다(전3:1-8). 문제는 우리가 그때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11절).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때를 아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문제는 때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셔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보일 수 있지만 참아야 하셨다. 때를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게 바로 겸손함과 인내와 순종이다.
지금은 품절되었지만 『요한복음 산책』에서 이현주 목사는 “성인은 때에 맞추어 움직이되 때를 놓치지도 앞지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티끌만큼도 사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겸손하고 사심을 갖지 않으면 때가 보이고, 때를 잡을 수도 있다. 우리의 욕심, 두려움, 믿음 없음이 눈앞에 온 카이로스를 놓치게 하는 것, 우리는 때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은밀하게 가시다
예수님은 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은밀하게 가신다(10절). 조심하며 올라가셨다는 말, 갈릴리에서처럼 이적을 행하지는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게 예수님의 운명이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3절), 그 ‘행하는 일’이 이적이다. 또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4절), 큰 데 가서 이적을 행하라는 말이다. 대놓고 기적을 베풀라고 종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콘트롤 받지 않으신다. 그저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 비밀리에 올라가신 것, ‘은밀히’는 ‘이적 없이’, ‘인기 없이 초라하게’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에 자신을 맞추셨다. 서두름도 없고 늑장 플레이도 없다.
그만큼 예수님이 겸손하셨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비밀리에 가셨겠나? 아니다. 때를 잘 몰라서 비밀리에라도 “일단 가고 보자” 그러셨겠나? 그것도 아니다. 카이로스 신화처럼 기회라는 것은 무성한 머리털 때문에 잘 볼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카이로스는 만들어가는 것, 보라! 같은 이슬을 먹고도 뱀은 독을 만들어내고, 소는 우유를 만들지 않나?
언제나 위풍당당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 그런데 어이없게 은밀히 가셨다고는 하지만 그 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 어떤 이적도 행하지 않고 가셨다는 것은 고독이 아니라 예수님의 겸손이자 용기다. 우리도 이걸 배워야 한다. 겸손과 용기, 겸손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고, 용기는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아는 결단력, 이 겸손과 용기만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때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사람이 참 많은 시절이다. 자영업자들도 대기업도 죄다 너무 힘들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답답하고 지루하지만 주님이 곁에 계심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때에 맞게 반드시 역사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