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군중들에게 예수님은 영웅이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걸 알고 즉시 배 타고 가버나움으로 좇아갔다. 예수님의 수상보행(水上步行), 광풍 부는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임금 삼고 싶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면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좀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계속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모세는 40년을 만나로 먹이셨는데 뭘 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참 떡, 생명을 주는 떡,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며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수군거렸다. “요셉의 아들, 목수 아들인 것 다 아는데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야” 그런 반응이다(41, 43절). ‘수군거리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했을 때 쓰인 바로 그 단어다. 유대인들이 수틀리면 원망했기에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신다. 훗날 바울도 이런 경고를 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0-11).
예수님은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도 옛날과 똑같냐?” 질책하신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 제발 내 말 듣고 좀 배우라는 말씀이다. 수군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시면서 35절에 이어 다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하신다(48절).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도 죽었는데 또 만나 타령이냐? 그것보다 생명, 영생을 택하라”고 촉구하신 거다. 그런데도 그들의 반응은 ‘서로 다툼’이었다(52절). ‘수군거리다’와 마찬가지, 그들은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
본문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한 반응이다. 61절에 ‘수군거렸다’는 표현이 또 나온다. 66절을 보면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군중들이 벳세다로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예수님께서 섭섭함을 느낄 정도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왜? 한 마디로 영치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영치들이 ‘헛다리 짚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다분히 갈 테면 가라는 말씀이지만 “너희는 안 가겠지?”라는 기대감(?)도 내포된 질문이다.
떠나간 사람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 그들의 반응,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떠나갔다(66절).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을 군중이라 하지 않고 ‘제자 중에서’라고 한 것이다. 우리 설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떠났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메시지로 떠난 사람들을 예수님은 한 번도 붙잡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19장의 한 부자 청년도 그랬다. 세상의 즐거움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십계명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온 청년,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 없이 예수님은 불쑥 엄청난 요구를 하신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청년은 울상이 되어 떠나가는데 우리 같으면 아까운 청년을 놓쳤다고 땅을 쳤겠지만 예수님은 “젊은 사람이 급하시긴, 농담이야 농담” 그러면서 붙들거나 “내가 너무 셌지? 한 2년 지나면 확신이 생길 걸세” 그러시지 않았다. 붙잡지도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으셨다.
복음,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메시지 때문에 시험 드는 자는 붙잡지 않으셨다. 물론 누군가가 우리의 인격이나 말버릇, 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시험 들거나 떠나가면 그때는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메시지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메시지를 사람들이 시험들지 않게 버터를 자꾸 바르면 음식이 느끼해진다. 문제는 우리의 태도, 자기 성격 때문에 비난 받을 때는 열을 내고, 예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때는 덤덤하다면 그건 잘못된 태도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사진1)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천국을 사랑하는 자는 많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스도께서 떡을 나누어 주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나 고난의 잔을 마실 때에는 같이 마시는 자가 거의 없었다.” 오병이어 기적 때 그 많던 사람들이 훗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막14:50). 빵보다 더 큰 것, 질병 치유보다 더 큰 인생의 동기와 목적을 가르치셨지만 알아듣지 못한 영치들, 육적 만족을 기대하고 따랐던 사람들, 물질의 소박함, 거기서 행복을 느끼려 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말만 것, 그들에게 영적 말씀은 그저 부담되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선택해야 할 말씀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예수님의 외로움이 듬뿍 담겨있는 질문,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인생은 선택,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 “내게는 선택이 없었다”(I had no choice)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찌보면 우리에게는 거의 매순간이 선택의 기회일 수도 있다.
제자들도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맞는다. 조용한 시간, 예수님은 이제부터 고난이 있을 것이라며 십자가를 예고하신다. 메시아를 믿고 메시아가 영광을 누릴 때 그 영광에 동참하고 싶은 화려한 꿈을 갖고 3년 동안 따랐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다. 맘에 안 든다.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제와서 어떻게 하라고? 거기다가 많지도 않은 12제자 중에 하나는 배신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름을 언급하시지도 않고, 답답하다. 아니 엄청 쇼크 먹었다.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 3년 동안 들은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말씀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더 어렵다. 이게 제자들의 입장이다. 요한은 마지막 절인 71절에서 그 배신자가 시몬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임을 밝히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3절), 말씀이 계속 아리송하다. 세속적 욕망으로 따랐다면 이제는 포기해야 할 시점이다. 예수님의 인기에 취해서 능력에 열광하고 말씀에 매료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떠났다. 영어 성경에 12제자들에게 물었다고 한 것 보니 열 둘 외에는 다 떠난 것 같다. 다수결에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떠날 때다. 제자들마저 흔들릴 수 있는 상황, 바로 그때 예수님이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서글픈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래서 선택이 쉽지 않다. 세계적인 부흥강사인 빌리그래함 목사 친구 분의 간증이다. 산을 좋아하는 분이라 주변의 산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는 산속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는다. 한국 산과 달리 미국의 큰 산들은 어마어마한데 길을 잃었다.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그도 당황했고, 두려웠단다. 그러나 아는 지식 총동원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드디어 한 오두막집을 발견했고, 그곳에 사는 노인의 도움으로 살게 됐단다.
그런데 그 노인께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고 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은 흔히 빨리 길을 찾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기를 선택하지만 그것은 곧 죽는 길이라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히려 위로 올라가기를 선택해야 해. 산 정상에 올라가서 마을이 어디 있는지,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고 내려와야 사는 거야” 그런 충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게 진리이고,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12제자, 이제 남느냐? 떠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섰는데 예수님은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누구에게 가야 하나?
시몬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라고 대답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따르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고치신 것 때문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것, 바로 영생의 말씀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이다. 이 대답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던 그 유명한 신앙고백보다 의미가 더 깊다. 요한복음에는 그 신앙고백은 없다. 하지만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냐”라는 대답이 너무 멋지다. 완벽한 사람이거나 신앙이 완전해서 한 대답이 아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믿은 거다. 적은 믿음이지만 나름대로의 판단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한 것, 그래서 해박한 성경 지식은 없어도 ‘영생의 말씀’에 붙어있기로 결단한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있는 놈 있다’는 말이 있는데 베드로는 말씀을 붙어있기로 작정했다. 말씀,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말씀’이라 표현했다. 예수님을 로고스(λόγος)라고 한 건데 로고스는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의 중요 개념, 온 우주의 합리성과 생명을 주는 원리(principle)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만 단순히 말이란 것은 한 존재의 생각이나 욕구를 나타내는 수단, 우리는 말을 통해 그 존재를 안다. 만일 그 존재를 볼 수 없다면 말이 그 존재의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영이시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 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이셨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육신적으로 뵐 수 없는 시대, 우리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안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책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양식을 언급했다. 첫째는 ‘계시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계시 자체이고 계시의 중심이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 성경이다. 성경은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 성경도 마찬가지다. 레위기를 읽고, 에스더서를 읽고, 시편을 읽어도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구약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책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레위기의 제사 제도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고, 시편의 탄식에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힘을 얻어야 한다. 또 십계명은 주님이 주신 사랑의 명령으로 알고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내면 뭐가 남을지 아느냐”며, “모든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 것 뿐”이라고 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그리스도를 싸고 있는 강보요 그를 뉘고 있는 구유”라고 했다.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셋째는 ‘선포된 말씀’, 설교를 언급했다. 문자로 쓰인 성경, 이 문자를 살아나게 하는 것이 선포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로 살아난다는 것, 그래서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설교는 정신적 교훈도, 정치적 이념 선포도, 윤리적 각성 촉구도 아니다. 웃고 떠드는 만담도 아니고, 간증 집회나 단순한 QT 발표도 아니다. 중심에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가 있고, 그리스도의 준엄한 명령이 있고, 결론을 그리스도로 마치는 것, 그게 설교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고 했다. 말씀을 잘 지키면 복 받고, 번성하고,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말씀 정도가 아니다. 영생(Eternal Life)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생명을 위해 오셨다(요10:10).
우리도 베드로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선물 때문에 믿는 것 아니지 않나?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이 좋아서, 예수님의 꿈과 생각이 좋아서, 그 말씀이 좋아서 따르는 것 아닌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은 2천 년 전과 같이 오늘도 동일하게 성령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을 주고 계시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는 있다. 말씀은 붙잡을 수도 없고 또 보이는 열매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토라(תּוֹרָה)가 생명이었고, 토라가 복을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보기에 토라는 변방 초라한 민족 종교의 말씀일 뿐이고, 그들이 대단한 국가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무시했다. 또 까다롭게 인간 삶을 제약하기에 썩 내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 민족을 살리고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지금도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있다.
우리도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보물이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조차 못한다면 불쌍한 사람, 그리고 외면하거나 떠난다면 더 불쌍한 사람 되고 만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그 말씀이 보물, 복음이기 때문이다. 복음, 마치 전파와 같다. 아무리 크게 송출해도 수신기가 없으면 들을 수 없다. 또 주파수가 맞아야 들린다. 그래야 소리도 들리고, 인터넷도 열려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진다. 기억하라. 말씀 안에 생명 있고, 예수 안에 생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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