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옥수수와 나』에 이런 유머가 나온다. 동유럽에서 잘 알려진 유머인데 지젝이라는 현대 철학자가 즐겨 쓰는 농담이기도 하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믿는 환자가 있었다. 다행히 오랜 치료와 상담 끝에 이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사는 이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며칠이 못 되어 이 환자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으로 다시 병원으로 달려왔다. 의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 남자는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와 무서워 죽겠어요” 그런다. 몸을 떨며 의사 앞에서도 두려움으로 연신 뒤를 돌아본다. 의사는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잖아요. 알잖아요?” 그러자 그 남자는 “저야 알지요. 그런데 저 닭들은 모르잖아요?”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유머다. 어쩌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이런 모습으로 산다. 현대인들은 광대한 바다에서, 빽빽한 밀림에서, 막막한 사막에서 길을 잃은 모습으로 허둥대며 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잘 아신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다.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그러지만 세상의 소리에 흔들림이 없으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예수님의 이 자기 선언은 마치 어둠 속을 비추는 등대이자, 빽빽한 밀림 속에서 손에 쥐어진 지도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우리 마음의 혼란을 평정케 하기에 충분한 말씀, 이 선언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말처럼 힘이 있는 은유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호수”라 하면 마음에 광활한 바다가 열리면서 편안해지지 않나?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절대 필수(absolute necessity)이시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선언은 “나를 먹으라”는 주님의 강한 요청이기도 하다.
내 살을 먹으라
“내 살을 먹으라”(54절), 이 말씀에는 ‘나를 희생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 그런데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소나 돼지, 닭이나 오리, 그리고 수많은 생선들의 희생이 따르듯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희생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간다. 자녀는 부모의 희생으로 자라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리를 잡는다. 나의 이익도 그렇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나는 이익을 얻는다. 한 사람의 영웅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이 희생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내 살을 먹어야 산다”고 하신 말씀은 좀 끔찍해 보여도 사실이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사는 것, 예수님이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목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원리는 사시사철 맑고 푸르고 아름다운 갈릴리 바다와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는 죽은 바다 사해를 비교해 봐도 확인이 된다. 사람들은 “사해가 죽은 바다가 된 이유는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며, 갈릴리 바다가 푸르고 아름다운 것은 물을 받은 만큼 내보냈기 때문”이라며 받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면 사해처럼 죽고, 받은 만큼 베풀면 갈릴리 바다처럼 늘 맑고 풍요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 바다는 요단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갈릴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흘러간다. 그런데 사실 갈릴리 바다만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갈릴리의 수면 높이가 해저 212m이기 때문이다. 일반 해수면보다 엄청 낮다. 이 정도면 어디로 물을 흘려보낼 처지가 못된다. 그런데도 갈릴리 호수가 물을 내려보낼 수 있는 것은 사해가 더 낮기 때문이다. 해저 394m, 그래서 갈릴리의 물이 사해로 흘러간다. 그게 갈릴리 바다가 깨끗한 이유다. 만일 사해가 없었더라면 갈릴리 바다도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산다.
희생으로 치면 하나님보다 더한 존재는 없다. 하나님은 바다와 같은 분이시다. 대륙으로부터 오염된 모든 강물이 유입되어도 바다는 말없이 다 받아준다. 그래서 바다(받아)라는 이름일까? 그 바다로 인해 강이 살고 땅이 산다. 하나님도 그런 분, 인간의 폐수를 다 받아주신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다. 십자가가 뭔가? 카타바시스(κατάβασις),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다 받아주신다. 기도도 그런 거다. 기도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넋두리다. 신세 한탄도 하고, 원망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원도 아뢰고, 생떼도 쓰지만 하나님은 다 받아주며, 우리를 위해 죽도록 희생하신다.
나를 먹어야 산다
“대식가는 먹기 위해 살고 슬기로운 자는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답게 “다른 사람은 먹기 위해 살고 나는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하였다. 먹기 위해 살든 살기 위해 먹든 사람은 먹고 마시며 산다. 이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먹어야 할 것을 잘 먹으면 건강하게 잘 살고, 독이 든 음식을 먹으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은 ‘나를 먹으라’고 하신다. 막돼먹은 사람처럼 말씀하신 건가? 한 번 권해 보신 정도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먹으라고 권하고 또 권하신다(54, 56절). 그래야 생명이 있고, 그래야 당신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그 음식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거나 먹나? 술이 주식 되면 되겠나?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덜 호전적이며 조용하고 평화주의적인 반면,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훨씬 호전적이고 파괴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어떤 음식을 먹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잡탕밥에 헛배만 잔뜩 부르면 그것들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할 것이다. 반면에 사랑의 양식, 희망의 양식, 믿음과 진실의 양식을 먹는 것, 그게 곧 하나님을 먹는 거다. 예수님은 자신이 참된 영혼의 양식이라며 ‘나를 먹으라’고 하신다(55절). 그래야 영혼의 풍성함,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작은 예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먹으라’, 이 말씀에 깊고 오묘한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모든 축복과 은혜가 담겨 있다. 먹으면 힘을 얻는다. 능력이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먹으면 영생’이라 하셨는데 영생을 양식에 비유하는 것은 이미 창세기에도 나타나 있다. 범죄 이전 아담과 하와는 영원히 살 수 있었다. 생명나무 열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덴동산 한가운데 선악과와 함께 있던 생명나무, 원죄를 저지른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면서 하나님이 내렸던 주요 조치 중 하나가 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신 것이다(창3:22). 성경은 “생명나무 길을 불칼이 지킨다”(창3:24)고 했다.
이 나무는 장차 올 천국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한데(계22:2)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나무이고,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54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은 바로 이 신의 음식이 우리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대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대할 때의 태도는 실로 엄청났다.
초대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이 만찬을 “불사의 약이자 죽음을 막는 해독제”라 불렀다. 이것이 중세의 화체설(transubstantialism)로 발전했다. 우리는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는 쯔빙글리의 상징설(symbolism)을 따르지만 이 상징설은 성찬의 신비를 제거한 아쉬움이 있다. 화체설은 떡과 포도주를 들고 기도하는 순간 그 떡이 예수님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한다. 보이는 떡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한 지나친 해석이지만 그때 그 빵을 앞에 두고 있던 성도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의미 있다. 손에 쥐어진 것이 빵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님! 그때 그들이 느꼈던 생생함, 거룩함, 황송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의 만찬 때의 빵을 집에 가져다 매일 조금씩 떼어먹기까지 했다. 여기서 심방 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사정상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의 집에 갖다준 것이 심방의 시작이었다. 그만큼 소중히 대했기 때문에 주의 만찬 때 치유와 기적과 회복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과의 연합’을 느꼈다. “우리는 운명공동체”라고 고백했다. 한편 루터는 공재설(consubstantialism)을 주장했고, 칼빈은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 Theory)을 주장했다.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것이고, 영적 임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물질에 부가되지 않고 영적으로만 임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먹고 있냐는 것이다.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먹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의 진설병도 일년내내 두게 하셨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먹고 마신다’가 왜 현재시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동작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존재 전체를 삼키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원성에 우리의 유한성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사랑에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진리에 우리의 불완전한 진리가 삼켜지고, 그분의 거룩한 영에 우리의 부정한 영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마음에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이 삼켜질 것이다. 그게 사는 것,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고, 삶이 의미로 충만해지고, 우리의 삶에 방향이 잡히고, 우리의 삶에 영원이 깃드는 것이다.
내 피를 마셔야 산다
오직 피만 먹고사는 흡혈박쥐도 동료가 죽어 가면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서 동료에게 먹인다고 한다. 공생의 원리를 지키는 것이다. 피를 먹어야 사는 흡혈박쥐처럼 우리는 예수를 마셔야 살 수 있다.
어떤 알콜 중독자가 맥주병만 보면 “마누라!”하고 불렀다. 가족들이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치료를 계속하면서 언제쯤 퇴원하겠느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맥주병을 맥주병이라고 하면 퇴원 할 수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공을 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의사가 테스트를 했다. 맥주병을 보여주며 뭐냐고 물었더니 맥주병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퇴원 수속을 하고 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소주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처제! 처제가 여기 웬일이야?” 했단다.
예수님은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53-54절)고 하셨다. 화체설을 지지하는 말씀일까? 당시 유대인들은 오해했다(52절).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다. 모세 같은 불세출의 지도자가 함께할 때도 불평했고, 엘리야도 죽이려 한 그 후손들답다.
초대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식인종 취급받은 거다. “나의 피를 마시라”, 유대인들에게 혐오스러운 말이다. 그들은 피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고, 피채 먹는 것을 엄격히 금기시하였다. 현재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코셔’(Kosher)라고 하여 동물의 몸에서 피를 완전히 뺀 음식을 먹는다. 피를 빼기 위해 소금으로 고기를 문지르고 세 번 물로 담그기까지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 피를 마시라는 뜻인가? 아니다. 당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56절)고 하셨다. 예수의 피를 마시면 살아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언약의 피’라 하셨다(막14:24). 주의 만찬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계약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재확인하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의 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이자 그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점은 주의 만찬(Lord's Supper) 제정 본문이 없다는 점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주의 만찬을 행하시는 장면을 전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없다.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세족식을 행할 뿐이다. 왜 그런가? 먹는 빵이나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나? 이는 의식이 아니라 예수 믿고 사랑하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내 살이니 먹으라”, “내 피니 마시라”며 생생하고 감각적 언어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현실화되고 생생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기적을 성령께서 지금 베풀어주시기를! 영적 주파수가 맞아 생생한 소리가 들리듯 그렇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막연하고 공허한 말씀이 되면 안 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든 역사할 수 있는 말씀, 어디에 있든 우리 곁에 있는 말씀, 이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생명나무 실과처럼 생생하며 그 열매처럼 달콤하고 맛이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생명의 풍요로움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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