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좀 알리고 가시지. 빨리 따라잡아야 해. 저 분 놓치면 우리는 굶어 죽어.” 예수께서 배 타고 가던 제자들과 수상보행(水上步行)으로 합류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실 때 배 타고 가버나움까지 뒤따라간 무리들의 열심, 보통 열심이 아니다. 하지만 돋보이는 열심이기는 해도 열심이 사람 잡는 것, 그들의 열심은 표적의 목적인 예수께 대한 관심이 아니다(26절). 예수님은 그들의 열심을 기복신앙, 떡이나 얻어먹고 허기나 채우려는 심보로 보셨다.
무리의 기대는 옛날 모세 때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일에 비견할만한 기적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이나 만나를 먹인 것에 비해 예수님은 그저 한 번 이적을 행했을 뿐이고, 모세가 전(全) 민족을 만나로 먹인 것에 비해 예수님은 고작 5천 명에게 떡을 분배한 것에 불과하며, 모세가 ‘하늘에서 내린 떡’을 제공한 반면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인 떡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한다.
이는 기적의 핵심을 놓치고 또 기적을 요구한 것, 그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생명의 떡”(35절)이라는 선언이었다. “나는…이다”(“I am” saying)라는 형식의 자기 선언, 캠벨 몰간(G.C.Morgan)은 “예수의 이 자기 선언에서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본다”고 했고,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지극히 엄숙한 신성의 표시”라 했다. 공관복음에 주로 나오는 간접 화법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7회에 걸쳐 예수님의 직접 화법을 통한 자기 선언이 나오는데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는 이 선언이 첫 번째 자기 선언이다.
무엇을 구하고 있나?
예수님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27절)고 하셨다.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두 양식이 대조를 이룬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이 썩을 양식을 주려고 하신 일은 아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알리시려는 것인데 무리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려고 하기보다 메시아가 오시면 다시 한 번 만나를 내려 줄 것이라는 고정된 메시아관에 맞춘 기대감으로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갑지 않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은 “썩을 양식 구한다”며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으셨다.
영적 동기와 목적이 아니라 육적 동기와 목적인 것을 아셨기에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구해야 한다고 하신 것, 무리가 구하는 양식이 아니다. 무리가 구하는 양식은 이 땅의 양식인 떡과 물고기, 그리고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썩을 양식’이라 하신다. 실제 유통기한이 지나면 썩어서 먹을 수 없기 때문이거나 결국은 썩을 수밖에 없는 육의 양식의 한계 때문인 것 같다.
오병이어로 그 엄청난 떡을 만드신 예수님은 능력의 본산이시다. 한편 그때 제자들은 떡을 분배하는(delivery)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그들의 택배는 아마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육의 양식, 생명의 양식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먹을 것만 주어지면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과 의미와 보람이 있어야 만족하고, 그래야 행복해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했다. ‘썩을 양식’을 추구하는 삶에서 탈피해야 한다. 삶의 질이 달라져야 한다.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유대인이 있었다. 어느덧 나이 들고 병이 나 임종을 맞게 되었다. 곁에는 걱정하는 가족들이 둘러서서 그를 지켜본다. 환자가 가족들을 찾는다. “여보, 당신 어디 있소?” 마지막 유언을 하는 줄 알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내가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그 다음은 아들과 딸을 찾는다. 차례로 “아빠, 여기 있어요” 대답한다. 그런데 아빠는 막내를 찾는다. 막내딸이 “아빠 나 여기 있어요. 아빠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야 아빠” 그러자 힘을 다해 일어나 앉으며 마지막 말을 한다. “그러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냐?” 그의 관심은 가게, 일이었다. 의미 없는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무엇을 구하고 있나? 육신의 양식은 세상의 기업가나 권력자들이 주는데 예수 믿으면서 이런 양식만 구한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 이런 행복을 구하려면 세상 논리를 좇고, 로또를 사거나,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하거나, 분위기 있는 카페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떠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오히려 시간과 돈과 헌신을 빼앗아가는 곳이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빵 대신 말씀 주는 곳, 비싼 침대 대신 마음의 평화를 주는 곳, 무기 대신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곳, 땅의 행복보다 하늘의 행복을 주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처럼 빵을 주려고 하면서부터 타락이 시작되었다. 성도들이 하늘의 복보다는 이 땅의 복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말씀보다 재물과 권력을 더 추구한다. 썩을 양식의 노예가 되고 썩을 양식의 전도자가 되었다. 묻는다. 무엇을 구하고 있나?
뭘 자꾸 하려 하나?
예수님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무리에게 양식을 일과 연결시켜 말씀하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 그러자 무리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물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뭔가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일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예수 믿는 것이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위한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자꾸 뭘 하려 하냐? 그 말씀이다.
그때 반응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절),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뭐하는 분이십니까?”라고 물은 거다. 노골적 무지, 불신의 질문이다. 그들만 그런가? 우리도 행동주의나 업적주의에 빠질 때가 많지 않나? 헌금이나 헌신을 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거나 어떤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며, 기적을 행하거나 어떤 능력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한다(31절). 모세 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일에 비견될만한 어떤 이적을 행해 보라는 것, 그러면 모세와 같은 인물,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거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절), 만나를 모세가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 그 만나는 먹어도 또 배고프고 계속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또 다른 떡이 있는데 그 떡은 한 번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떡이라는 말씀이다.
그제야 무리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이 말은 4장 15절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던 그 말과 같다. 무슨 떡인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떡을 달라고 계속 떡만 조른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였다. 먹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 바로 당신’이시라는 선언이다. 마치 4장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라는 말씀과 같다.
당신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했다. 내 방법, 내 길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 그분이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믿음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반대말이 ‘미워한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 하는데 사랑한다의 반대말을 ‘사랑했노라’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전에는 사랑했다는 것, 이게 문제다. 믿음은 현재적이어야 하고, 사랑도 그래야 한다. 어떤 결과나 능력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게 우리의 할 일이다.
인디어에 “디레 디레”라는 말이 있다. “천천히 천천히”란 뜻이다. 박노해 시인이 2016년 1월에 서울 부암동의 라카페갤러리에서 인디아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는 “한 잔의 차를 급히 마실수록 차는 빠르게 바닥나듯 빠르게 달려갈수록 주어진 삶은 빠르게 줄어든다”고 했다. 그때 초대장을 이렇게 썼다. “더디 가더라도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사람들, 함께 가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대를 초대합니다. 숨 가쁘게 달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 마음 깊은 곳에 가 닿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전시했던 사진 중에 ‘라자스탄 여인들의 위엄’이라는 사진이 있다. 태양의 땅 라자스탄 여인들은 가슴이 다 서늘해지는 달빛의 미인들,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와 차림새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맨발로 동네 한바퀴’라는 사진은 흙먼지 날리는 가난한 마을의 골목길을 폐타이어를 굴리며 달리는 아이, 맨발이지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걷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또 ‘아침을 깨우는 짜이 한잔’이란 사진이 있다. 마른 가지나 소똥으로 불을 피우고 홍차 잎과 허브로 끓인 짜이가 몸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깨워준다고, 짜이 한잔의 여유가 없는 아침은 삶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마신다고 한다. 그리고 ‘디레 디레, 천천히 천천히’, 검고 갈라진 손으로 민트 잎을 따는 여인들, 해 저물고 노을빛이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레 디레, 천천히 해야 내 영혼이 따라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은 80년대 민주 투사였고 저항시인이었다. 사형 구형을 받고 7년을 옥살이했다.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지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했다. “사랑하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다.
조바심을 갖고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잠깐씩이라도 멈춤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그리고 뭘 자꾸 하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묻는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고 사랑인데 “뭘 자꾸 하려 하나?”
먹어야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먹는 것, 이게 하나님의 일이다. 내 안에 있는 상처나 아픔을 말씀으로 보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정립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일이 있으면 안 된다. 주님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신다. 열매는 그 다음에 기대해도 된다. 그때까지의 시간은 절대 무익한 시간이 아닐 것, 무엇보다 우리 마음이 정리되고 채워져야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만나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며, 오히려 먹어도 또 배고프게 되어 매일 먹어야 하는 일용할 양식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보내신 또 다른 떡은 한 번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 떡’ ‘생명의 떡’이라 하셨다. 떡을 씹듯이 꼭꼭 예수님을 먹으며 묵상해야 한다. 믿는 것이 먹는 것이고, 여기에 생명이 있다.
천안의 명물 중 하나가 호두과자다. 너무 유명해서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다 살 수 있다. 거리가 멀지만 인천에도 호두과자 판매점이 꽤 있다. 그러나 원조는 천안, 여기저기서 자기네가 원조라고 우기지만 알만한 사람은 어느 집이 원조인지 다 안다. 그 원조집에서 호두과자를 사면 박스 안에 1934년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호두과자의 유래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안쪽에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글짜가 눈에 띈다. 처음 만들어 팔 때부터 전도지를 넣어서 팔았다고 한다. 그 전도지 내용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
“고 심복순 여사 부부는 1934년부터 호두과자를 개발하여 지금까지 고객 여러분들께 봉사해 왔습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성심껏 제공하여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빵 역시 삶 자체를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빵’은 아닙니다. 호도빵보다 더 맛이 있고, 한 번 먹으면 배 고프지 않는 생명의 빵,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생명의 빵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평안과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일동 드림”
멋지지 않나?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는 주리지 않게 하시는 사랑의 근원, 사랑 그 자체로서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또 생명의 근원, 생명 그 자체로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그리고 진리의 근원, 진리 그 자체로서 진리를 알게 해주시는,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예수님 플러스 알파(+α)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예수님께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