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곤 목사의 역사 정리와 기념사업을 감당해온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는 “김준곤 목사님이 1948년 9월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시고 첫 사역을 한 교회는 경기도 파주시 율목길 85(금촌동 334-117)에 소재한 예장 통합 교단 소속 금촌교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1월 5일 금촌교회를 방문하고 왔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조선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송창근, 김재준 교수가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해 정규오, 신복윤, 박창환, 조동진, 엄두섭 등 51인과 함께 부산 고려신학교에 편입했다가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복구하자 박형룡 박사(조직신학)를 모시고 올라와서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셨다”고 밝혔다.
이어 “1995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경기도 가평 광성수양관에서 ‘처음 사랑으로, 처음 부르심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CCC 전국간사수련회 저녁집회에서 김준곤 목사님은 ‘CCC 역사와 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하시면서 신학교 졸업 후 첫 사역 교회와 관련한 스토리를 언급하신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김준곤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시고 경기도 파주 금촌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본인은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면서 히어링(듣기)을 훈련할 목적으로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성결교신학교에서 미국 선교사가 영어로 가르치는 신학 강의를 들으러 기차를 타고 왔다갔다 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인정진 사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고 하셨다”고 밝혔다.
특히 “김준곤 목사님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마침 일선 시찰을 나왔던 신안군 장산면 대리 출생의 장홍염 국회의원이 국회팀과 시찰을 하고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인정진 사모님과 어린 딸(은희, 1946년 10월 29일 출생)과 함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마을로 내려갔다고 회고하셨다”고 소개했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6월 25일 아침 주일에 새벽기도 설교를 하려고 4시쯤 일어났는데 대포 소리가 나서 연습인가 보다 하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5시쯤 되니까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북한군이 남침해 피난민들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대포 소리도 가까워졌다며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셨다”고 밝혔다.
또한 “김 목사님은 정미소를 하는 대 갑부인 권사님이 부인회(여전도회) 회장이었고, 저에게 줄 사례비는 성가대 대장하던 집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피난을 가버려서 어디서 돈 한 푼 얻을 데가 없었다는 증언과 함께 감동적인 일화를 밝히셨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이 금촌교회에서 나와 10리 정도 오다가 소아마비 아들이 있는 그 권사님 집에 가서 긴 기도를 했다. 그 때 그 아이가 커서 전쟁이 끝나고 몸이 기적으로 나아져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 출신인 장홍염(한국민주당) 국회의원이 국회팀과 버스를 타고 일선 시찰을 하고 돌아가는 버스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 훗날 김 목사님이 어디서 집회를 하는데 한 건장하게 잘 생긴 청년이 찾아와서는, ‘목사님, 금촌에서 정미소 했던 아무개 권사를 아세요? 제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나았어요’라고 해 기쁨과 감격 속에 그 권사님 아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하셨다”고 밝혔다.
이어 “김준곤 목사님은 1958년 9월 장로교 총회가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으로 분열이 된 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장 합동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두 교단 소속 교회 중 역사가 1948년 이전에 설립된 교회를 찾기 시작한 끝에 예장 통합총회 소속 금촌교회에서 전도사 신분으로 담당 교역자로 시무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금촌교회는 1885년 4월 5일 주일에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1907년 3월 15일 개척하고 이원긍, 신태영 씨를 중심으로 금촌3리(새마을)에서 초가 4간을 예배처로 삼은 역사적인 교회”라며 “1907년 1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 부흥운동의 불길이 남한으로 번져오면서 설립된 교회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김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부인 인정진 사모가 주일학교를 했다는 이유로 좌익에 의해 1950년 10월 3일 죽임을 당했다. 김 목사의 부친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와 부친을 죽인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처벌을 받지 않도록 탄원서까지 써주셨다”고 밝혔다.
이어 “김준곤 목사는 1951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전남 영광군 법성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한 후 1953년 3월 광주 서부교회(현 서현교회)에서 6개월 여 목회를 한 후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으로 재직했다”고 했다.
그리고 애양원 한성신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하고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 오늘의 민족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운동과 세계복음화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의 역사 정리의 한 매듭을 푼 것 같다”며 “김준곤 목사님의 본래 출생 연도는 1924년인데, 호적으로는 1925년이다. 1925년 탄생 100주년에 ‘김준곤 평전’ 등을 출판해 다시 한 번 민족복음화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게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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