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랑 한바탕 싸우고 났더니 왜 이리 아직도 분한지… 아직도 요령있게 대처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다. 여자는 다소곳이 자기나 아이들을 완벽히 챙겨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이 아직도 뱃속 깊게 깔려있는 남자를 상대로 21년간 똑같은 테마로 싸우는 게 너무 싫다. 자기는 다른 남자에 비해서 아주 많이 참고 봐주는 시각으로 나오는 것도 구역질 나고, 때론 아주 단순하게 쉽게 넘기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다. 그 상황만 모면하는 방법도 슬기로움도 해답도 아는데, 아직도 똑같은 테마에 지치지도 않고 똑같이 발끈하고 열이 나는 내가 너무 황당하다. 그래도 내가 변해야 한다 이게 해답이겠지만서도… 더 뭘 원하시나요?”
10년 전쯤 조선일보에 ‘여자로 살기 정말 힘들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칼럼 내용이다. 여성 장관 후보자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칼럼이었는데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여자로 살기가 쉬워졌을까? 또 여자로 살기만 힘들까? 모두가 다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시대인데 본문 속의 예수님도 참 힘드시다. 물론 우리가 힘든 것과는 좀 다르지만 너무 외로우시다. 오죽하면 ‘증언’(testimony)이라는 단어를 연발하셨을까? ‘증언’은 본문의 핵심 단어(key word),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데 ‘증언’ ‘증거’라는 단어가 아홉 절에 무려 12번이나 나온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것, 잘한 일인데 고침받은 사람이 밀고하는 바람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겼다며 박해하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감히 하나님과 하나라고 신성모독한다며 아예 죽이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시다. ‘증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2절), 증인이 누군지를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당당하셨던 이유다. 다음 절을 볼 때 사람들은 그 증인을 침례(세례) 요한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33절)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사람의 증언에 근거할 생각이 없으시다(34절).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다. 언제나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 이게 신앙인의 기본 스탠스여야 한다.
물론 침례 요한을 인정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요한을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하셨다(35절). 하지만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며 예수님은 그 증인을 하나님이시라고 했다(37절).
하나님이 예수님 자신의 길과 행동을 인정하신다는 말씀, 경험으로 알지만 내가 내 인생을 변호하면 힘이 없고 또 힘이 들지만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변호해주신다면 그건 최고의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고 했다. 혹시 천만 안티로부터 댓글로 공격당하나다연 어떨까? 또 어느 날 검사가 우리를 기소한다면 어떨까? 사탄이 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마 끔찍할 거다. 두렵고 화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다. 그런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방패요, 영광이요, 다윗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증언하신다는 말이 이렇게 사람을 든든하게 하는 거다.
한때 “힘내세요.”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그런데 사실 힘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여기서 더 짜내라고? 지금도 힘든데”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유행하는 격려의 말이 바뀌었다. 그 말은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말이 바로 이거다. “힘들지? 그런데 잘하고 있어, 내가 도와줄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변호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해주신다. 이게 성령님의 역할이다. 우리 성경은 성령님을 전에는 ‘보혜사’(保惠師)라고 번역했었다. 가톨릭은 이것을 '보호자'로, 공동번역성서에서는 '협조자'로 번역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파라’(곁에서)와 ‘클레토스’(말하다)의 합성어다. ‘곁에서 말하는 자’, 그래서 ‘변호사’, ‘증언자’라는 의미다. 그렇다. 성령님은 내 인생의 변호사다. 끝까지 나를 지지해주는 최고의 헬퍼(Helper)가 되실 것이다.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증거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4절).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포함한 환자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고통 가운데 있는 생명들을 고쳐서 풍성함을 누리게 하고, 인간을 얽매던 교리나 전통을 무력화시키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삶의 소망과 의미를 주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 거다. 그 표적들이 바로 하나님의 시인의 도장이며 그에게 일을 맡겨 보내셨다는 사실의 도장, 위임의 도장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사역이었다. 말씀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자신을 드러내셨다. 또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무지와 어둠을 깨우쳐 주고,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를 초래했고, 팔레스타인의 변방에서 외치던 소수의 작은 소리로 묻힐 것 같았다. 그런데 그저 작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 전 우주를 울리는 엄청난 소리였다. 2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그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가 되었다.
이게 바로 말씀의 힘이자, 말씀으로 행하신 일의 힘이다. 행동이 따라야 한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소리를 내는 법, 우리는 이것을 진실의 힘이라고 한다. 진실은 강하다. 위력에 눌리고 외면당해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진실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시대에 일본에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자들의 행적은 치욕으로 남지만 저 만주벌판에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며 살았던 독립군들의 행적은 잊혀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 우리가 행한 일이나 업적이 우리를 증거한다. 화가는 이론이 아니라 작품으로 승부하고, 음악가는 노래가 그의 위대함을 증거하며 정치가는 자신의 정책과 헌신으로 말하는 거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검사는 기소로 말하는 것, 여기에 사심이 끼고 권력이 작용하면 그 내용이 엉망이 되고 만다.
요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에게 너무 과도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근래에 어느 당은 다수의 힘으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건강가정기본법은 동성애를 법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진짜 괜찮은 건가? 그들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시민 단체들이 강력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그들의 법 개정 추진이 세월이 흐른 후에도 부끄럽지 않게 느낀다면 자신을 증거하는 작품이 되겠지만, 스스로도 되돌리고 싶은 법안이라면 결국 그들의 법 개정 추진이 자신을 고소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찌됐든 이제라도 부끄럽지 않게 일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약 2천 번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39절). 기독교를 핍박한 10대 황제중 가장 그 정도가 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가 “모든 성경을 불 태우라”고 명령하고, 심지어 성경을 지닌 자를 다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건재한 책이 성경이다. 거짓교회들과 거짓 그리스도들과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을 파괴하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그 박해 속에서도 보존되고 더 많이 읽힌 것이 성경이다. 예언이 성취되고 성경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저 구원 얻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촉구하는 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고 물으셨다. 구약이 내 얘기인데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물으신 거다. 자기 위주로 읽으면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한다. 특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반드시 예수님의 인격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어린 아이처럼 선물에만 관심 갖지 말고 선물을 주는 인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피자를 있게 한 건데 아이들은 아버지가 퇴근길에 들고 올 피자에만 관심을 두지 아버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피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일뿐 피자 자체에 고귀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아이는 피자가 있으면 좋아하고 없으면 운다. 피자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을 그저 자기 신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만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출애굽기에 보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19:4)고 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강조점이 ‘가나안’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내가’, ‘내게로’라는 표현을 거듭하며 자신의 인격과 존재를 강조하신다. 인격적 만남이 중요하다는 뜻인데 이스라엘은 이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하나님만 만나면 인생의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기 원하신다.
루터(Martin Luther)는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성경을 해석하는 계산점”이라 하였다. “만일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내면 무엇이 남을까? 전 성경은 어디서나 오로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뿐이다. 성경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도, 예언서에도, 시편에도, 복음서에도, 서신서에도, 계시록에도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을 기록하며, 장차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열쇠이시다. 바울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했다. 성경은 구원 이야기(Salvation story), 곧 생명을 주는 구원 교과서다. 그런데 그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하나밖에 없듯이 성경을 바르게 여는 열쇠도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이라는 인격이 빠지면 천국도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사막 같은 우리 인생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은 한낱 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기억하라. 성경은 생명을 주는 책이다. 이 생명은 성경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리스도가 주는 이 생명을 얻고 나면 그 다음부터 성경은 사랑 이야기(Love story)가 될 것이다. 역사가 되었건, 허드렛일이 되었건 문자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에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다 들어있다 할지라도 문맥(context)은 ‘사랑’,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게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라면 유치할 것이다.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의 연애, 남의 편지는 의미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의 편지라면 레위기 같은 지루한 율법들도, 요한계시록 같은 무서운 심판 이야기도 영생을 얻은 자의 눈으로 보면 즐거울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신학자는 말만 들어도 그 신학의 현란함과 난해함에 치를 떠는 분이다. 그분 신학의 핵심은 간단하다. 칼 바르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이 물었다. “당신이 발견한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무엇인가?” 칼 바르트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중심이 그리스도인데 성경을 통해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있나? 그저 우리를 정죄하는 형법이 되고, 지루한 고대 유태인들의 종교사가 되고 말 것이다. 안 된다. 성경에서 감추어진 보화를 찾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보화는 많이 찾을수록 기쁨이 충만해지듯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많이 발견할수록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이 말씀에서부터 요한복음을 읽으며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망이요 비극의 출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생명과 그 풍성함이 성경을, 세계를, 우리 인생을 빛으로 충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