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배하는 인간 형성
예전은 기독교교육의 핵심 사역이자 본질적 영역이다. 예전에 관한 연구는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연구영역 중 한 부분이기에 예배 자체와 구성, 기획과 설계를 교육학적으로 의미 있게 다루는 것뿐 아니라, 예전 자체가 가진 형성적인 힘에 집중하여 예전과 교육이 지닌 관계와 맥락을 살펴보고 예전 자체가 지니고 있는 교육적 방향과 의미, 성경적 인간론에 근거한 인간 형성을 위한 교육적 토대로서의 예전 등의 영역 또한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한다. 기독교교육이 보다 통전적, 형성적이기 위해서 지성보다 실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는 특히 기독교 예배의 실천이 필수적이고 본질적임을 가르쳐 준다. 사랑을 훈련하여 형성되고 이로 말미암아 행동으로 인도하는 것이 독특한 예배의 실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사랑을 훈련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참 시민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성품은 매력적인 이야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해주는 것인 ‘좋은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예배는 마음을 사로잡고 이 사랑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반복적 실천에 참여함으로 제자로 훈련받아 마땅히 붙잡아야 할 텔로스를 꿈꾸게 한다. 우리의 행동과 행위를 형성하는 좋은 삶에 대한 지향은 생각보다 선인지적이며 우리의 사랑이나 욕망이 특정한 방향을 향해 겨누는 방식은 실천을 통해서이다. 즉, 예배를 통해 우리의 성품 안에 특정한 행위를 계속해서 새겨 넣음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 2의 천성 또는 본성이 되게 한다.
예전적 인간론은 실천, 체현된 공동체적 반복 행위와 의례, 일상의 삶이 지닌 형성적 힘을 인식하여 주변 문화의 분석과 비판에 초점을 다시 맞춘다. 칼빈은 인간 마음의 본성 자체가 마치 “우상 제조 공장”과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다른 욕망들에 의해, 타인들에 의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지난 세월 동안 만들고 형성한 문화적 제도를 통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실천과 의례들은 욕망을 형성하고 궁극적 관심을 규정하는 예전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경쟁하는 예전들, 인간의 욕망과 사랑과 갈망을 사로잡고 잘못된 삶을 지향하게 하는 문화적 실천에 맞 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항적 형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매튜 볼튼(Matthew Boulton)은 기독교 예배의 실천을 통한 형성적 힘을 간과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수없이 많은 형성적 실천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소중한 형성적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입증하거나 상징적으로 확증하기 위한 활동으로 형성적 실천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로 인해 기술이 끊임없이 인간을 욕망하고자 하며, 형성하고자 하고, 수없이 많은 실천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세태 속에서 기독교교육은 예배의 실천과 원천을 뿌리로 삼아야 한다. 교육이 일차적으로 욕망의 형성 예배의 대상에 관한 문제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교육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세속적 예전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충성을 요청하며 마땅히 소망해야 할 욕망을 다른 실천과 의례로 대체하고 있다.
나아가 예전은 인간을 어떠한 지향성을 가진 특정한 사람으로 형성한다. 예전이 이런 기능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세상에 대한 방향 설정이 머리로부터 아래로 내려가기보다는 몸으로부터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이 실제적으로 발현되는 많은 모습들은 합리적인 숙고와 의식적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많다. 앤더슨은 “예전을 몸으로 쓰는 행위(Liturgy: writing faith in the body)”라고 표현하며 “예전적 행위와 예전에의 참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존재하고 행동하고 알아가는 방법을 형성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몸을 통해 앎이 형성된다는 것, 즉 몸을 통해 우리의 의미체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이 주는 의례와 실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예전적 참여를 통해 우리의 몸과 행동과 지각이 체현되어서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일상적 삶 속에서 그리스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 역시 다른 많은 생물들처럼 어떤 “일정하고(patterned) 반복적이고(repeated) 목적이 있는(purposeful)” 행위들을 모방을 통해, 흉내 내기를 통해, 실천을 통해 배워야 한다. 학습의 과정의 대부분 역시 이러한 “일정하고, 반복적이고, 목적이 있는” 행위들을 통해 이뤄지며 이러한 것들을 ‘의례(ritual)’라고 한다. 캄스톡은 의례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 즉 감정 사고, 그리고 몸의 움직임은 서로 분리되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상호작용(synchronic interaction)을 한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의례란 이미 존재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의례 속에서 사고와 감정, 그리고 몸의 움직임이 동시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남으로 시너지 효과를 통해 역동적인 다이내믹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존 리스(John H. Leith)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일의 공예배 만큼이나 일정하고, 반복적이고, 목적이 있는 분명한 행위는 없다. 예배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공동체적 가치, 정체성, 사명과 소명을 머리로 배울 뿐 아니라 직접 몸으로 실천하면서 교회의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이 되도록 한다. 이러한 예배를 매주 드리면서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해 나가고 변화되어 진다. 예배는 가장 좋은 실천적 의례이기 때문에 교회의 신자들을 믿음, 성품, 생각, 행위 등을 형성하고 변화시키기에 가장 좋은 선물이자 도구가 된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새롭게 회복되고 창조되어 세상을 위해 보냄 받은 선교적 증인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의도적으로 실천을 바꾸는 것, 복음의 이야기 속에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소망함으로 “우리의 지각을 위한 배경, 우리의 성향을 위한 근거, 세상 속에서 우리의 행동을 위한 기초가 되는 예전과 의례, 훈련을 다시 활성화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가치 있고 존경할 만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선제적으로 있어야 하며,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그에 합당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구원 지식을 먼저 배우고 이에 합당한 말과 행위를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독일어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섬김’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섬김’이라는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배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자 동시에 ‘인간이 이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감사의 응답과 반응’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면하여 섬김으로 만나는 ‘장’이자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섬기시며 봉사하시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신자의 삶은 변화되고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실천적 개혁이었으며 특별히 신학의 개혁일 뿐 아니라 신학의 실천인 예배의 개혁이었다. 칼빈에게 예배의 개혁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지름길이자 개혁의 표지였다. 리스는 초대교회 예배의 회복을 추구했던 칼빈의 예배신학을 예배가 성경적으로 학적으로 충실해야 하며,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덕성과 성품을 함양해야 하며, 단순해야 하는 것으로 요약했다. 개혁주의 예배의 핵심 원리는 인간 스스로가 고안해낸 것이 하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규정하신 대로 마땅히 실천해 내는 것이다. “칼빈이 염두에 둔 바는 하나님이 우리 예배에서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예배할 때 그분은 교회의 예배 가운데 일하신다. 칼빈에게 교회 예배는 인간의 창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문제”라고 휴즈 올리판트 올드 (Hughes Oliphant Old)는 말한다.
성경 전체의 핵심 가르침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믿음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예배 의식을 통해 표현한다. 예배는 의례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타자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반영하며 이 경건과 섬김이 예배를 통해 조화롭게 통합된다. 예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만남을 통해 형성하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통해 구체적 일상의 삶으로 나아간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개혁자들이 이해하고 실천한 예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행동과 신자들의 책임 있는 반응으로 이뤄진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을 하나님의 행동과 그 행동을 신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이중적 차원으로 이해했다 예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만남, 양자가 모두 함께 행동하지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시고 신자가 응답하는 거룩한 만남인 것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단순히 개혁주의가 말하는 일종의 신념들, 지식들, 교리들, 신조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해야 한다. 스미스 역시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측면보다 정서적 측면을 강조한다. 스미스는 “건전하고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의 세계관 연구는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 알빈 플랭틴가(Alvin Plantinga), 브라이언 왈시(Brian Walsh), 리처드 미들턴(Richard Middleton)에 의존하고 있다. 예배의 참여와 교리 공부의 조화를 통해 이뤄지며 반복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열망과 소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교리 공부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예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개혁주의 교육은 학습을 통한 교육, 즉 교리와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배움과 참여를 통한 교육의 조화, 즉 반복적 예배를 통한 말씀과 성례의 조화를 이뤄내야 하며 이 조화 속에서 개인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말씀과 계시의존성을 강. 조하는 개혁주의의 특징은 칼빈이 이야기했던 교육 원리, 즉 형식 교육과 비형식적 교육의 조화를 통한 신앙인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교육은 “기독교적 지성”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온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한국교회가 영적 각성과 영적 부흥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예전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한 예배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예배는 삶의 변화를 위한 신앙의 실천에서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삶은 단순히 인지적, 교리적 차원의 표현을 넘어서서 예배는 예배자의 ‘인격’을 하나님 중심으로 빚어놓는다.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을 깊이 예배할 것이고, 또한 예배와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백성을 빚어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교회의 사명은 “기독교의 언어와 습관과 실천을 가르쳐 그들이 믿음의 언어 중심에서 성경 본문을 통해 빚어진 후에 나가서 배운대로 제자의 삶을 살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 사회에서의 분자화되고 개별화되며 파편화되어 가는 인간 소외와 고독 상실의 시대 속에서 예배는 다시금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의 자리로 개인과 개인을 호명하여 부르는 역할을 한다. 예배의 공동체성은 파편화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함께 모여 서로에게 평안을 전하고, 함께 기도하고 위로하며, 성경을 함께 읽고 말씀을 듣고 배우며, 함께 떡과 잔을 마시는 실천을 함께 담당한다. 이 모든 실천은 하나님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의례적 실천이다. 또한 개혁주의 공예배는 이러한 예배의 실천의 중심성을 강조하고 예배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방식을 보다 구체화하는 구성요소들의 실천을 강화시킨다. 현 시대의 공예배의 위기로 여겨지는 개인주의 공동체성의 약화, 예배 구성요소의 축소 등의 현상은 개혁주의 예배 원리를 따라 새롭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종훈은 지적한다. 예배는 영적 갱신과 부흥을 위한 가장 기초적 토대이며 하나님 나라의 텔로스를 형성하기 위한 최적의 장이자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지성과 영성, 정서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형성을 행하시는 공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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