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돌아오던 중 피곤하고 목말라 들리신 곳은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가, 거기서 이름 모를 한 여인을 만나신다. 영국의 석학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이 “부족한 것이 얼마쯤 있는 것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 했는데 이 여인은 ‘얼마쯤의 부족함’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목마름으로 가득 찬 갈증의 사람’이었다. “물 좀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으로부터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인간적, 세상적 목마름
물로 시작된 대화, 대화의 주제는 ‘물’이었다. 공기, 음식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절대 필수 중 하나다. 음식 한두 끼는 걸러도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이 없지만 공기와 물은 없으면 못 견딘다. 모든 생명체의 출발, 물질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모든 동식물과 인체의 주성분, 성인은 60% 이상, 신생아는 77%, 태아는 97%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물을 안 마시면 탈수증에 걸리고, 생존이 불가능한 것, 황성주 박사는 “물은 영양가 높은 최고의 보약”이라 했다. 맞다. 아침에 기상 후 마시는 한잔의 생수는 위장기능을 강화해주고 위장청소 및 변비 예방에 기여한다. 또 충분한 물 섭취는 노화 방지는 물론 피부를 싱싱하고 탄력성 있게 해줌으로써 미용에도 좋다. 시원한 샘물이나 심산계곡의 ‘생수’는 우리 몸에 더할 나위 없는 보배, 그래서 구미 의학자들은 매일 8잔의 물을 마실 것을 권한다. 충분한 물 공급이 건강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지구 표면의 3분의 2가 물이다. 하늘에는 수증기와 구름의 형태로, 그리고 땅속에는 지하수의 형태로 존재한다. 수분이 부족하면 사막지대가 되고, 생물이 살아남지 못한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방은 건조한 곳이고 비가 많이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더더욱 귀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여름에 큰비가 내려 강에 물이 가득한 것을 보고 엄청 부러워한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보배 낭비’라 한다. 이스라엘의 1년 강수량은 우리나라의 1/40에도 못 미친다. 그래서 비가 오면 한 방울도 없애지 않고 전부 모아 유용하게 쓴다.
광야의 오아시스 같은 우물가, 예수님은 마을에서 약 800m 떨어진 이 우물가에서 이 여인과 6번에 걸쳐 대화를 주고받으신다. 처음 여인의 반응은 까칠했다(9절). 아니 까칠한 정도가 아니라 뜻밖의 반격이었다. 한적한 우물가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고 물을 달라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 더욱이 유대인 남자의 요청이었기에 드러낸 적대적 감정이 담긴 반응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적대시하고 상종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
예수께서 자신이 생수를 줄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셨을 때도 여인의 반격은 계속되었다. 이 우물이 야곱의 우물, 야곱이 우리에게 주셨다며 야곱보다 더 큰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우리 지역이 더 우월하지 않냐 그런 반격이고(12절), “생수를 주신다? 깊이가 30m나 되는데? 더 좋은 생수? 어려우실 걸요” 그런 말투다. 예배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그랬다.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이야말로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장소 아닌가요?” 그런 주장이다.
주고받는 대화에 긴장감이 있다. 반격에 반격이 이어진다. 인종적 문제로 인한 갈등이 반영된 것이자 지역적 자존심이 반영된 반격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이 여인의 목마름이었다.
이것뿐이 아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깊이 숨겨진 목마름이 또 있다. 남편이 자꾸 바뀌면서 생긴 갈증, 짐작컨대 성적 목마름 또는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목마름이다. 세상에 믿을 남자는 없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다. 이 남자, 저 남자와 같이 살아봤지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같이 살 남자가 없다, 자꾸 깨지면서 받은 상처가 크다. 외로움도 컸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를 문란한 여자 취급한다. 서럽지 않았을까? 남편만 없는 게 아니다. 친구도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다른 여자들의 입방아 찧는 게 싫고, 눈 흘김 받는 게 싫어서 뜨거운 대낮에 혼자 물 길러 다녔다(6-7). 한 마디로 ‘동네 왕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이 여인이 갖고 있는 관계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사는 게 힘들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불만, 대책이 없다. 대낮에 혼자 물 길러 다니는 것도 너무 피곤하다.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남 얘긴가? 현대인들 모두가 죄다 심각한 목마름 속에 살지 않나? 자녀, 돈, 학벌, 명예, 건강에 대한 목마름… 현대인에게 가장 큰 목마름은 물질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더 많은 수입,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에 대한 목마름, 더 큰 차, 더 넓은 집,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물질에 대한 목마름, 엄청나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동료나 친구들을 만날 때 생기는 인간관계의 목마름도 우리의 목마름이다.
거룩한 목마름
이 여인의 밑바닥에 거룩한 목마름도 숨겨져 있다. 물론 메시아에 대한 지식도 있고, 선지자들에 대한 지식도 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잘 아는 모세 5경에 대한 지식도 있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고 어디서 예배드리는지에 대한 지식도 있다. 종교적 지식이 꽤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지금 너무너무 목이 마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목마름이다. 불신자들은 자기를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우린 어떤가? 성경에 대한 지식도 있고, 교회 문화와 교회 생활에 대한 지식도 있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생활은 별개다. 그래서 신자이면서도 삶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라든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갈급함, 큰 목마름 없이 산다. 이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영적 목마름, 거룩한 목마름이 없는 게 사마리아 여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거룩한 목마름을 끄집어내신다. “내가 네게 하나님의 선물, 생수를 주겠다”고 육신적 목마름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 목마름이 있음을 암시하며 해갈할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주겠다고 하셨다(14절). 그런 생수라면 나도 좀 있으면 좋겠다는 갈증을 느꼈던 여인, 당장 그 생수 좀 달라고 한다(15절).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속에 있는 문제를 끄집어내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느닷없는 말씀이다.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아 깊이 감추어 둔 건데 그 문제를 끄집어내신다.
여기서 남편은 잘못된 예배나 이념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인은 불쑥 튀어나온 대답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였다. 5+1인데 의미 없었을까? 행복의 샘물이 완전히 메말랐던 것 같다. 이 말은 현재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종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의 환신이 없다. 갈증을 해갈하려 하지만 갈증이 줄기는커녕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다. 잠시만 시원할 뿐, 이내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다 포기했다는 것, 그 얘기는 그만하자는 뜻일 수도 있다. 형태만 다르지 유대교의 니고데모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무기력, 이건 구원으로 가장하고 있는 모든 종교와 이념과 기독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죽은 예수 믿는 죽은 기독교, 죽은 크리스천 되면 안 된다.
부도덕한 문제, 수치스러운 문제인데 다 끄집어내신다. 여인 입장에서는 낯선 유대인 남자 앞에서 자기 남편에 관한 문제, 자기가 숨겨둔 치부, 속살이 다 드러나는, 봉변당한 느낌이다. 상처투성이인 자기 인생이 다 폭로된 것, 자기 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기를 맞은 거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표정, 그럴듯한 태도로 숨기고 있지만 예수님에 의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여지없이 그 상처, 그 더럽고 추한 것,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그냥 덮고 살려고 했는데 자신이 너무너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
불만 속에 살기는 했어도 이렇게 자기가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자기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거룩한 것에 대한 목마름 없이 살아왔는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다 드러나면서 깊숙이 숨겨져 있던 거룩한 목마름이 표출된다. “도대체 누구신가?” 범상치 않다.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고백한 말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였다.
이런 목마름은 흔히 어떤 결정적인 위기와 어려움이 닥칠 때 드러난다. 평상시에는 모르고 살다가 문제와 위기가 닥치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 너무 무능하고 부끄럽다. 이렇게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구나 그걸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문제는 예수 앞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 앞에서 회개하고 무릎 꿇고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가야 그것을 깨닫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가야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거나 실패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라야 비로소 이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는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세상적인 목마름, 인간적인 목마름만 느끼며 살다가 이제는 거룩한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여인은 드디어 자기 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자기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묻는다.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는 분이심을 믿나?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내가 주는 물’이라 하셨다. 1인칭 단수 ‘내가’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물, 마르는 물이 아니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직접 주겠다고 하신다. 세상이 주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약간의 도움만 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데 직접 해결해 준다고 하신다. 여기서 ‘마시는 자’가 단수인 점도 생각해야 한다. 구원이 예수님과의 접촉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6장에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고 하셨고, 7장에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38절)고 하셨다. 샘물 정도가 아니라 강,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거다. 자기만이 아니라 이웃들도 먹일 수 있는 풍족한 물이다. 예수님은 이 생수를 성령이라 하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8), 성령은 하나님, 무한한 분이시다.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거룩한 목마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게 되는 것이고, 예수를 만나게 될 때 거룩한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되는 거다. 갈증이 해소된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성령을 받게 되고, 그래서 늘 신선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기까지 계속 늘 새로운 은혜, 늘 신선한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묻는다. 무엇에 목마른가? 그게 만일 세상적인 일이나 육신적인 일이라면 거룩한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갈증으로 몸부림치는 시대를 사는 우리의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그 목마름을 끄집어내길 원하신다. 내가 비참한 죄인이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며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마치 육체가 탈수병에 걸려 죽는 것처럼 그의 신앙도 말라 죽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령을 받으면 영생, 믿음의 결과가 영생이다. 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모든 일에 형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디오피아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유일한 기독교 왕국이었다. 이디오피아 교회에 무서운 박해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때, 교회 성도들이 서로 만나 안부를 묻거나 복음 전도할 때 자주 쓰는 말이 ‘당신의 초장은 푸른가?’라는 말이다. 푸른 초장이 맞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아니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심령이 메마른 초장이 아니라 푸른 초장이 되어야 한다.
푸른 초장이 되려면 우리는 매일 주님의 주유소에 차를 대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언어로 “가득 채워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이사야는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고 했다.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 구원의 우물에서 그 생수를 길러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의 거짓된 것과 거짓 남편을 제거하고 진정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솟아나는 은혜를 누리는 물댄 동산이 될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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