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건국 후 지금까지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 교육과 문화의 발전, 복지의 실현 등 교회의 역할을 자율적으로 잘 감당해 왔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깨어지고 교회를 세상의 논리와 법 아래 두려는 순간, 종교의 자유는 침해되고 교회의 본질은 무너진다. 나라를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종교계가 찬반으로 나누어지는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정부 기관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과세로 인해 정교분리의 원칙이 침해 당하는 것은 반대이다. 신성(神聖)의 교회를 기업이나 비영리 단체로 보는 비종교적 가치관도 수용하기 어렵다. 교회의 정책은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만 온전한 법(法)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찾고 해결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정부는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 아래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권태진 – 광야에서 희망을 외치다
교회의 미래는 트렌드가 아니라 브랜드다. 콘텐츠를 활용하기 위해 루터가 제안하는 핵심은 번역이다. 그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콘텐츠로 번역했다. 찬송가로 번역했고, 그림과 교리로 번역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이런 방법으로 가르쳤다. 하나의 콘텐츠를 사용하더라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법칙이 있다. 콘텐츠를 채택하는 출발점은 교회의 필요성이다. 왜 필요한지, 그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why). 목적이 정해지면 ‘무엇’으로 가르칠지를 정한다(what).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지가 콘텐츠의 완성이며, 번역이다(how). 이와 같은 과정으로 번역한다. 번역은 아이들의 사고력을 촉진시킨다. 지금까지 교육 현장에서 경험한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런 접근을 어색하게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탁월하게 반응한다. 삶의 맥락을 사고력을 통해서 말씀으로 채워간다. 관점이 바뀌면 교육이 바뀐다.
박양규 – 다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하여 사랑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 주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까요? 곤궁에 처한 자가 당신이 도와야 할 이웃이라는 교훈을 율법사에게 알려 주시려 하였을까요? 만일 이런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좀 잘못 사용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순간 유대인들은 어떤 것에 놀랐을까요? 사마리아인의 ‘친절한 행동’에 놀랐을까요? 아니면 착한 일을 한 자가 ‘사마리아인’이라는 데 놀랐을까요? 후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것을 사랑의 모범이나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그 정체성을 규명하려 했다면 오히려 강도 만난 자를 사마리아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존을 위해서 했거나,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작은 악은 용납하십니다. 그러니 작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한 우리 삶의 투쟁이 소중하고 하나님도 이를 인정해주십니다.
이종철 – 예수의 위대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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