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도는 변증학자다. 기독교 변증은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한다. 신학은 전문적이지만 동시에 대중적이다. 세계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마땅히 창조주를 더 알기 위해 애쓰고, 더 찬미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여기에서 평신도라고 차별을 둘 수 없다. 루터는 인간의 선한 공로가 구원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완전히 배격한다.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순간 기독교 변증은 실패로 돌아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공로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곧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대적하기 위한 도구로 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에 반대하여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서는 오직 은혜를 강조해야 한다. 자연적인 능력으로 획득하는 은총이란 없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될 때만 가능한 은총이다.
김요환 – 변증이 신학이다
그렇게 신앙의 외형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우상숭배는 하지 않는 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절에도 안 가고, 영적으로 더러운 곳도 안 가고, 노래방도 안 가고, 꽤나 거룩한 모습을 갖췄다고 여기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거룩한 모습은 갖췄는데 신앙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지난날의 신앙을 보자면 내가 하나님께 드린 열과 성의에 따라 복이 내려오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물론 복의 기준은 재정이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드린 헌금과 열심에 반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점점 꺾여 갔었다. 천국 열쇠는 사람과의 마음을 열고 닫는 것이라 하고 싶다. 내가 열고 닫는 주체가 아니라 오직 예수가 열쇠 자체인 것이다. 주님께 민감하고 예민할수록 열쇠는 만능이 되리라. 주님이 다 하실 테니 말이다. 주님이 마음을 주시면 바로 사과하고 바로 엎드려야 하는 게 답이다. 답을 알아도 답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다시 자세를 낮추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공미연 – 내 신앙의 뒷모습
‘선교사’라면 선교지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하며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지금의 저의 모습이 부끄럽게만 느껴졌습니다. 주님께 조용히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ㅇ 은혜라”라는 찬양의 가사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셨고, 지금 저의 모습도 기쁘게 받으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기에, 제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즐거워 하기를 원하시며, 어떤 사역보다도 주님이 어떻게 저를 인도하셨고, 인도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삶을 통해 오직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탁지일 – 보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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