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중의 성경,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말씀이 아마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 바로 다음 절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세상을 구원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17절). 간결한 복음의 핵심, 너무 잘 요약됐다. 그래서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복음의 축약, 작은 복음’이라 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까지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 사랑이 지독한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한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는 “너무너무 사랑하사”(loved so much)라는 말이다. 아들을 보내주실 만큼 지독한 사랑이라는 거다. 많은 아들 가운데서 하나도 힘든데, 유일한 아들이니 얼마나 큰 사랑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돈 리차드슨(Don Richardson)의 『화해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을 보면 더 실감이 난다. 치열하게 싸우는 두 마을이 추장의 아이를 하나씩 교환하고 휴전을 하는데 부인도 많고 자녀도 많지만 하나 고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첫째는 이래서 안 되고, 둘째는 저래서 안 되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해 보내는데 그 아이가 죽거나 아프면 다시 전쟁이 난다. 선교사가 그 아이 보낼 때의 심정을 묻자 추장은 지금이라도 데려오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때 선교사가 하나님도 화해의 아이(Peace Child)를 보냈는데 그것도 외아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아이를 죽였다며 복음을 전했을 때 식인종들이 비로소 복음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이다.
죽을 줄 알고 화해의 아이를 보내신 하나님, 말썽꾸러기도 아니고,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독생자를 보내셨다. 바람 쐬고 편히 쉬며 놀다 오라고 보내신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고 보내신 거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임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희생인데, 바울의 표현대로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일(빌2:7)을 하신 거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고 자기를 낮출 대로 낮추어 종의 형체로 오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한 사랑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지만 이 사랑과 은혜를 실제로 누리려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나 다 받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씀, 믿고 따라야만 된다는 말씀이다.
하늘로부터 오셨다
본문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충 설명이며 요3:16-21절 내용의 반복 같은 말씀이다. 요한은 3장에서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표현을 여러 번 쓰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먼저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1절)라 했다. ‘월등하시다’, ‘절대 우월자’라는 뜻이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34절)라 했다. 반면에 침례(세례) 요한은 대단한 사람이지만 ‘땅에서 난 사람’, 31절 한 절 속에 땅에서 태어났다는 등 땅에 속했다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된다. 예수님이 침례(세례) 요한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 신적 존재라는 말이다. 급기야 요한은 예수님을 아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35-36절).
그리고 예수님의 권능도 언급한다. “만물 위에 계신 이”(31절),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손에 들려주신 이”(35절)라고 한 것이다. 그뿐인가? 요한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이”(34절)라고 선언한다. 무제한, 끝없는 선물이란 말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는 것은 성령을 ‘한량 있게’ 즉 제한적으로 받은 모든 인물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한 선지자나 선생이 아니다. 마태가 예수께서는 침례(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마11:9)라 하시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마11:11)고 말씀하신 것을 소개했지만 예수님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다.
침례(세례) 요한 스스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할 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시다. 비록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사셨지만 하나님(God-man),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것처럼 성령과도 완전히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본문은 열심히 읽어도 정확히 누구의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의 견해도 혼란스럽다. 머레이(Murray)는 30절에서 이어진 침례 요한의 말로 보고, 불트만(Bultmann)은 예수님의 독백으로 본다. 하지만 레온 모리스는 기록자 요한의 해설로 본다. 그 이유는 ‘그의 증언’이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좀 헷갈린다. 사실 이 헷갈림은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의 말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어디가 예수의 말씀이고 어디가 사도 요한의 말일까? 14절은 예수님 말씀 같은데, 15절은 “그를 믿는 자”라고 예수님을 3인칭으로 표현했다. 헷갈리지 않나?
3장 35절 이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버지’란 표현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고백인 것 같은데 ‘나’라는 표현 대신 ‘아들’이라는 제3자적 표현을 쓴 게 헷갈리고, ‘그의 손에 주셨으니’라는 표현도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이면 ‘내 손에 주셨으니’ 해야 하지 않나? 한편 요한의 표현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이 걸린다. 지금은 다르지만 당시엔 이렇게 표현한 예가 없고,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14:24), 하나라는 말씀, 구분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4:11)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예수님과 요한 사이에도 일어났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요한의 말과 예수님의 말이 구분이 없다. 요한은 예수님을 자기 안에 계시는 분으로 말한다.
요한만 그런가? 아니다. 제자들도 그렇고, 우리를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0-21), 우리도 믿음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라는 말씀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로마서 강해』라는 자신의 신학 명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저자를 그토록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이제는 그 저자로 하여금 나의 이름 아래 말하게끔 하며, 반대로 나 자신 그 저자의 이름 아래 말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지점 앞에까지 돌진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바울이 되고 내가 요한이 되는 거다. 바울의 뜨거움이 나의 뜨거움 되고, 요한의 예수님과의 관계가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로 재연된다.
이 일은 사실 우리 힘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하지만 성령으로는 가능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절). 한량없이 부어진 성령, 그 성령은 2천 년 전 사도 바울을 뜨겁게 만들었듯이 우리를 뜨겁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품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요한의 마음을 동일하게 느끼게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6:13).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절). 여기서 ‘믿는다’는 말과 ‘순종’이란 말이 동의어로 쓰였다.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여기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믿음은 곧 순종이다. 이렇게 사용한 이유는 믿는 자는 순종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의 결과는 영생이나 심판, 요한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마주치게 하면서 영생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현재성을 강조한다. ‘영생이 있다’는 말과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동사가 다 현재형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믿는 즉시 주어지고, 진노와 심판도 즉각적으로 받는다는 말이다.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 요한은 반복해서 이 현재성을 강조한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고 했다. 계속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최후 심판의 날 그 진노가 지축이 진동하듯, 우주가 무너지듯 그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줄기찬 진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으면 다르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의 대리자를 때린다. 그게 바로 갈보리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께 그 진노가 떨어졌다. 그래서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진노와는 멀어진다. 그것도 영원히.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예수의 사람이 된다.
유대인들의 거부가 계속되자 예수를 받아들인 자들의 지위가 법적으로 승인되었다는 차원에서 ‘인쳤다’는 동사를 썼다(33절). 그 의미는 첫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증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인증한다는 의미다. 여하튼 나중에 좋은 데 가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영생을 얻고 누려야 한다. 기억하라. 구원은 현재의 소유다.
또 여기서 말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5절)라는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더욱 더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예수님이 창조주이시고, 만물이 다 그의 것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31절), 예수님은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시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영생과 심판도 마찬가지, 예수님께 달려 있다. 그래서 만물의 원리와 존재 목적을 다 아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통치하신다면 그건 최고의 사랑이자 축복일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니고데모나 침례 요한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막 나온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누구도 손해 볼 일이 없다. 두 사람 모두 시커멓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광에서 나온 사람과 이제 막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이 손을 잡는 것은 문제가 있다. 탄광에서 나온 검댕이가 깨끗하게 목욕한 사람의 손을 시커멓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탄광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죄악으로 더러운 반면에 주님은 흠 없이 거룩하신 분, 우리는 감히 두 손을 내밀어 그 분의 손을 잡을 형편이 못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이 우리 손을 잡아 주셨다. 부끄러워 손을 빼려 해도 어느새 주님의 손이 우리의 죄 많은 두 손을 꼭 잡고 계신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다.
복음전도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 파리의 어느 홀에서 그 도시의 가장 비천한 사람들, 도덕적 하수구에 떠도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매일 밤 복음을 전했다. 반응은 야유와 모욕, 전도자도 사람인데 그것도 여성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녀가 연단에서 내려와 조롱하는 군중 속을 헤치며 뒷좌석에 쓰러져 있는 가련한 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부스는 그 소녀를 안고 “얘야, 내가 그리스도를 알려줄 만큼 너를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입을 맞춘다. 그런 입술이 뺨에 닿아본 적이 없던 소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그녀는 훗날 구세군의 사역자가 되었다.
이게 바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다. 비록 2천여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이다. 그리고 어떤 위기와 도전이 밀려오든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사랑,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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