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이러한 구분을 안 하는 경향이지만 소위 고등종교이든, 원시종교이든, 혹은 제도종교이든 아니면 자신만의 종교이든 인간이 종교를 갖게 하는 기저에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한시적인 인생을 사는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거기서 파생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장래 염려, 노후 걱정, 홀로 남겨질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 등 사람은 이 근원적인 두려움을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고자 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공포는 구체적 대상을 향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 유사한 상황이 되면 그 경험에 대한 학습의 결과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현실적 수준에서는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 경험의 오염으로 현재의 지각적 현실을 불필요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경우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고 개인의 삶의 질도 저하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괜히 겁먹고 지레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포보다 보다 막연한 것을 우리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불안은 막연하게 우리 마음에 떠도는(free-floating) 기분으로 그 정도로 불안할 것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적 욕동이 의식의 수준으로 표현되고자 할 때 개인이 느끼는 과도한 불안을 ‘신경증적 불안’으로 이야기하고, 초자아의 처벌로 인한 불안을 ‘도덕적 불안’으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불안들은 개인의 현실 검증력을 떨어뜨리고 현재에 집중하기 어렵게 하는 심리적 문제가 된다.
그러나 공포가 현실적 수준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불안 또한 개인의 현실을 더 명확하게 판단하면서 적응적이 되게 하는 기능도 있다. 이 불안은 ‘현실 불안’으로 개인에게 자신이 놓인 현 상황의 위험적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게 한다. 예를 들어, 사고가 날 정도로 많은 차가 다니는 횡단 보도를 건널 때 보다 더 긴장하고 좌우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주시하며 건너는 것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힘이 된다. 장래를 위해 적은 수입이라도 수입의 일부를 쪼개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행위 등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는 태도보다 훨씬 자신의 삶의 실존과 직면하고 대처하는 성숙한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 현실적 불안은 현실에 보다 정직하게 서게 하고 보다 건강한 결정을 하도록 돕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죄에 대한 처벌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떠는 인생들에게 겁을 주고 구원을 담보하며 불안을 조성하는 관계가 아니다. 자신의 법에 따르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처럼 협박하는 주술적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비현실적 두려움을 조성하는 자나 느끼는 자 모두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 심판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다(계1:8). 그리고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요15:15)로 여긴다고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 4:16)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심판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 주신 은혜에 대한 담력으로, 나보다 더 든든한 구원의 힘을 믿고 그 용서의 사랑으로 자신의 현존에 직면하며 다시 인생의 방향을 재정립할 용기를 얻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외함을 갖는다. 성경은 경외함에 대해 수 차례 언급하며 그들이 갖는 복에 대해 이야기한다(시34:9, 잠 19:23). 경외함이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앞에 자신의 실존을 그대로 깨닫는 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방향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그분의 계획앞에 스스로를 인정하는 마음의 질서인 것이다.
종교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경외함을 ‘누미노제(numinose)’경험이라고도 부른다. 거룩한 존재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반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공포로 떨지 않지만 초월하신 하나님을 향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존재에의 벅찬 매혹, 담대히 다가가도록 허락되었지만 함부로 경고망동 할 수 없는 존재에의 조심스러운 겸손한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보다 품위 있는 종교적 태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아쉬운 시대이다. 하나님의 이름, 은혜, 구원이 때로는 너무 값싸게 언급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외함의 태도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될 것이다. 이 질서가 혼돈이 될 때 경외심이 흔들리고 그 틈에서 사람을 미혹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온갖 이단사상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보다 정돈되고 단정하고 질서 있는 그러나 값없이 영원한 구원을 이룬 예수님의 은혜로 삶이 다시 재구조화되는 경외함 있는 우리가 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경애 박사(예은심리상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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