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성 요소는 이원론(몸과 영[혼])이 맞을까? 아니면 삼분설(몸과 혼과 영)이 맞을까?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바울은 왜 하필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했을까?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교회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오해들이 있다. ‘몸’(body)과 ‘영’(spirit)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영적인’ 혹은 ‘영성’과 같은 표현을 들으면 곧바로 비물질적, 비육체적인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몸’은 자주 ‘죄의 통로’와 같이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 맞게 되는 삶의 형태를 ‘몸’으로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인 역시 부활의 ‘몸’을 입고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심지어 바울은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몸은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신앙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정확히 정립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폴라 구더 작가는 이 책에서 몸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들을 바로잡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바울은 그의 글 어디에서도 ‘혼’(soul)이라는 단어를 ‘몸’(body)이라는 단어와 대조시키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바울은 몸의 죽음 이후에 계속 존재하는 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바울은 혼을 생각(mind)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실제로, 혼이라는 단어가 모두 몇 번 쓰였는지를 보면, 바울에게 혼은 플라톤의 경우만큼 지배적인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혼이라는 말은 로마서에서 4회, 고린도전서에서 1회, 고린도후서에서 2회, 에베소서에서 1회, 빌립보서에서 2회, 골로새서에서 1회,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 2회 사용되었습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 혼(soul)이나 영(spirit), 혹은 마음(heart)을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body)을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예배라고 선언하면서요. 이것은 정확히 어떤 예배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NRSV는 이 부분을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라고 번역합니다. 이 번역의 문제는 여기서 ‘영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울의 다른 글에서 보게 되는 ‘영적’이라는 단어, 즉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은 그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특정한 유형의 예배를 묘사하려고 사용한 단어는 그리스어 로기코스(logikos)입니다. ‘논리적’(logical)이라는 영어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고, 보통 ‘합리적이다’ 혹은 ‘이치에 맞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바울의 진술이 더욱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적절한 화답은 언제나 예배인데, 로마서 1-11장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에 대한 적절한 화답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코이노니아(koinōnia, NRSV은 ‘나눔’[sharing]으로, 새번역은 ‘참여함’으로 번역)라는 단어는 신약학은 물론 교회론 안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1 코이노니아의 적합한 번역어를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 단어가 가진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울림 때문입니다. ‘친교’, ‘회’(society), ‘공동체’, ‘나눔’ 등과 같은 표현들은 관계의 수평적인 측면(사람 대 사람)을 잘 드러내지만, 이들 중 어떤 표현도 관계의 수직적인 측면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표현은 수직적인 측면은 나타내지만 수평적인 측면은 가리키지 못합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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