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약학회(회장 이민규)가 23일 오전 서울 노원구 소재 한국성서대학교 복음관에서 가을논문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에는 ▲안호준 박사(독립연구자)가 ‘공관복음서 저자의 의도 표현의 적실성 탐구’ ▲김형동 박사(부산장신대)가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a):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장성민 박사(장신대)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의 비평(Kritik) 개념에 비추어 본 마가의 복합적 구약 인용 연구’ ▲이우경 박사(명지대)가 ‘플라톤의 에르 이야기와 누가복음의 부자와 거지 이야기의 상호텍스트성 연구: 상호텍스트적 독자를 중심으로’ ▲조재형 박사(강서대)가 ‘그리스-로마 배경에서 살펴본 멍에를 같이한 바울의 동료: 빌립보서 4:3의 그네시오스 쉬쥐고스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공관복음서 ‘저자의 의도’ 표현, 신중히 사용돼야
먼저, 안호준 박사는 “공관복음서의 작성자들을 ‘저자’로 부르는 것과, ‘저자의 의도’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를 묻고 연구한 결과, 먼저는 공관복음서의 텍스트적 속성을 고려할 때, 이것의 작성자들을 저자라고 부르기보다는, 기존 전승과 자료를 보존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과 더불어 나름의 독특한 기여를 보다 명료히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표현인 ‘구성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공관복음서의 형성 과정에 끼친 영향을 지나치게 구성자에게만 돌리기보다는, 구전 전승의 영향도 균형 있게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렇기에 ‘저자의 의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 상황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공관복음서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라는 표현은 좀 더 신중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청지기 비유, 탕자의 비유와 구조적 측면에서 비슷한 틀 가져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김형동 박사는 “비유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면서 듣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한다. 예수는 비유로써 하나님의 나라, 곧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다시 그린다”며 “청지기 비유는 탕자의 비유와 구조적 측면에서 연속된 비슷한 이야기 틀을 가진다”고 했다.
김 박사는 “비유 속의 아버지가 명예와 수치라는 당시의 문화적 도덕적 기준을 뛰어넘듯이(눅 15장), 비유 속의 주인 또한 계산에 기초한 보상의 원칙을 깨뜨린다(눅 16장)”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한 것이 자본주의적 틀에 의한 도덕적 코드가 아니듯이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 역시 금전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범하였듯이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재산(명예)을 허비한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청지기 비유는 청지기가 하나님의 집에서 율법을 맡은 자임을 나타낸다”며 “그는 당시의 세상의 관습에 따라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그에게 맡긴 일을 그릇되게 행사함으로써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였던 것이다. 유대 율법이 엄격히 금지한 청지기가 행한 ‘고리대금업’은 애초부터 주인의 뜻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비유는 율법의 이름으로 십일조와 성전세를 요구하였다”며 “성전 제도라는 이름하에 거룩의 개념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아 의를 독과점 함으로써 무고한 죄인들을 양산한 당시의 엘리트 계급을 향한, 특별히 가신 계급인 바리새인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의 에토스와 일치한다. ‘빚지다’라는 동사와 ‘빚’이라는 명사는 예수의 가르침의 맥락에서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빚· 잘못을 반영하는 단어”라며 “천문학적인 빚· 잘못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뜻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신성한 것을 범한 ‘용서하지 않는 종’과 마찬가지로, 청지기는 주인의 뜻과는 달리 빚· 잘못에 고리대금의 이자를 얹어준 그래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청지기 비유는 관계를 이야기한다. 비유 안의 행위는 비유의 케리그마적 속성에 대한 표시로 ‘주인이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16:8a)라는 비유의 마지막 결론은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오늘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며 “부활하신 주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주시며,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라고 말씀하신다”고 했다.
◆ 마가는 구약을 ‘주석’했는가, 아니면 ‘비평’했는가
이어서 세 번째로 발제한 장성민 박사는 “마가는 구약을 ‘주석’했는가, 아니면 ‘비평’했는가”라며 “벤야민의 비평 개념에서는 생산적 측면보다는 수용적이고 해석적 측면이 더욱 중시된다. 벤야민에게 어떤 해석학적 윤리가 문제시된다면, 그는 원저자의 영역이라 할 생산적 측면보다는 독자의 영역이라 할 수용적이고 해석적 측면에서의 윤리를 붙잡는다”고 했다.
장 박사는 “‘마가는 구약을 ‘주석’하였는가, 아니면 ‘비평’하였는가’라는 이 질문은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과연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였는가’라는 문제와 ‘보이지 않게 또 그만큼 한층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며 “마가가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구약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활용한 이유는 자신이 제시하려는 예수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하거나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권위 있는 근거를 보태기 위함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성경이 독자들이 직면한 동시대의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대화하고 경청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정경’이지만, 현재성을 물리치고 동시대의 문제를 억압한 채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강요할 만큼 권위적이지는 않다”며 “오히려 성경은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겨날 때마다 참신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한 신실한 정경”이라고 했다.
아울러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마가는 ‘어디에서’ 말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라고 했다.
◆ 플라톤의 ‘에르 이야기’와 누가복음의 ‘부자와 거지 이야기’, 상호 텍스트적 읽기
다음 네 번째로 발제한 이우경 박사는 “상호텍스트적 독자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에서 에르 이야기의 파편들을 발견하고, 이에 전자를 현상-텍스트로 그리고 후자를 발생-텍스트로 설정하여 발생-텍스트를 기반으로 현상-텍스트를 해석하게 된다”고 했다.
이 박사는 “우선 독자는 두 이야기 간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두 이야기 간의 선-후 텍스트적 관계를 확인하고, 두 이야기 간의 차이점에 집중하여 그 차이점에 따른 현상-텍스트의 상호텍스트적 의미를 생성한다”며 “그렇게 생성된 의미는 바로 ‘현상-텍스트’인 부자와 거지 이야기가 ‘발생-텍스트’인 에르 이야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현세의 인간은 저승을 다녀온 메신저에 의해 저승의 일을 전달받을 필요가 없다”며 “독자는 현세의 인간으로서 저승이 아닌 오히려 현세의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렇게 플라톤의 에르 이야기와 누가복음의 부자와 거지 이야기의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통해 독자는 플라톤으로 누가복음을 이해하며, 그 누가복음으로 플라톤을 극복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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