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 한국 문화와 현대의 세속 문화,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이 혼재된 현실을 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 대해 그저 관망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리처드 미들턴 교수(자메이카 캐리비안 신학대학원 구약학)와 브라이언 왈쉬 교수(트리니티 칼리지)는 세속된 사회가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하며 사회에 절실한 생명과 인도와 희망을 기독교의 사회적 구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는 모든 범신론적 관념을 거부하지만, 땅을 정복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포함된 자애로운 보호와 보존이라는 매우 중대한 요소 또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동산을 경작하며 또한 보존해야 한다. 우리의 문화 형성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고 창조세계에 대한 참된 돌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우리는 이 땅의 주인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야웨의 궁극적 주권에 대한 순종적 응답으로서 우리의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부름받았다. 땅을 정복하는 것은 언약적 책임의 문제인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반죽 속에 넣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셨다(마 13:33; 눅 13:20-21). 하지만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 나라가 서서히 성장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채울 것이라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후천년주의자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점점 나아지리라고 믿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투쟁이고 전투임을 인정하셨다. 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 죄의 누룩이 모든 창조세계 속에 철저히 퍼져 있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누룩도 ‘저주가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든’ 퍼져 나갈 것이다. 또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당신의 가공할 개입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철저한 무신론자들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세속주의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결핍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버나드 질스트라가 지적했듯이,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부정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속적 세계관에서 신 존재가 반드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세계가 어떠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말해야 할 메시지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속주의는, 세속(saeculum)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와 관계성에 회의적이다. ‘세속주의’의 어원인 이 라틴어는 직역하면 ‘시대’라는 뜻으로 특히 시간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이해된 창조세계를 가리킨다. 또한 이 단어는 역사 영역, 즉 모든 일의 시간적 영역에서 하나님을 점점 배제시킨다. 세속이 점점 절대화됨에 따라 현대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지위가 현저하게 점점 축소되었고, 그것에 비례해서 인간의 지위는 점점 확대되었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기독교 공동체를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예배다. 철저한 공동체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이 공동체가 주류 문화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배 때문이다. 공동체의 예배는 공동체 전체의 생활 패턴을 형성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공동의 정신 곧 세계관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는 공동체의 것으로 말이다. 결국 공동체의 예배는 그저 종교의식 정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이것이 롬 12:1-2의 요점이다). 바로 여기에 몰락해 가는 사회 속 기독교의 문화적 증거의 본질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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