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먹는 것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고, ‘유월절 음식’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먹고, 입고, 누리는 일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만찬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처럼,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식탁이 영안을 열었던 것처럼 본문도 단순한 풍어의 기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면 호숫가의 이 기적은 제자들을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잡은 것이 없었으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는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입니다(눅 5:11).
손윤탁 – 치유의 현장, 예수님과 함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기보다 죄책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배롭게 여긴다. 그들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기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배롭게 여기기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조자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기보다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배롭게 여기기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치유자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기보다 안전을 보배롭게 여기기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호자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여기기보다 부자가 되는 것을 보배롭게 여기기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번영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 부활 저편에 있는 기쁨을 보셨을 때, 예수님은 믿음으로 이 기쁨을 어느 정도 경험하셨다. 그 기쁨의 “실상”은 단지 미래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에 실현되었다. ‘실현되었다’는 말은 ‘실상화되었다’(아무도 사용하지 않지만, 히브리서 11장 1절의 “실상”이라는 단어를 반영하는 표현)는 말의 보다 친숙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바라는 것들”의 실재를 현재에 맛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믿음 안에 현존했다.
존 파이퍼 – 존 파이퍼의 구원하는 믿음
성경은 철저히 죄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제로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의 한 개인에게 일어난 죄는 고린도교회 전체와 관련된 것입니다(참조. 고전 6:6). 에베소교회의 한 개인에게 일어난 죄는 에베소교회 전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이스라엘의 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이스라엘 전체의 일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그렇기에 신자와 신자 간에는 다툼과 분쟁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직분자와 직분자 간에, 직분자와 교인 간에는 화평을 도모해야 합니다. 교회와 교회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하여 복음을 위해 힘써야 할 대상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서로 사랑하며 화목해야 합니다.
손재익 – 분쟁하는 성도, 화평케 하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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