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여러 이분법적인 양극단에서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택할 것인지 혹은 경제적 보상이 더 좋은 일을 택할 것인지의 갈등은 매우 큰 도전이 된다. 배우자나 연인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외모가 좋은 사람을 택할 것인지 성격이 좋은 사람을 택할 것인지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소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명분(名分)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실리(實利)는 ‘실제로 얻는 이익’으로 되어 있다. 이 둘이 완전히 대치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상대적 의미를 갖는 것은 맞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옳은 것일까?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 두 개의 가치가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면 기독교인 또한 명분을 택하든, 실리를 택하든 둘 다 옳은 선택이지 않을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둘 사이에서 명분의 선택이 옳고 바른 선택임을 깨닫게 된다. 창세기의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의 행동을 통해 명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운다. 배가 고팠던 에서는 실리를 주는 음식때문에 당장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장자권을 팔았고, 이 실리적인 행동에 대해 후대의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와 같이 망령되지 않도록 경고한다(히12:16). ‘망령된다’는 것이 경건하지 못한 행동(godless)을 의미한다면 이는 때로 우리의 실리 추구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 경건한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분은 심리학적 의미로 본다면 정체성(identity)이다. 에릭슨(E. Erickson)의 발달단계에 의하면 이 정체성은 10대 후반에 형성되는 자신에 대한 일관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 대는 여러 이유로 발달이 지연되어 10대에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젊은 청춘 시절,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는 힘은 개인의 ‘나 됨’을 형성하는 중요한 내적인 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열정을 다해 몰입할 수 있고,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거절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옳다고 주장하고 시대와 풍조가 대세라고 하여도 나 스스로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크게 요동하지 않고 중심을 갖고 나의 길을 갈 수 있다. 반대로,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이라고 하여도 그 길이 나의 양심과 판단에 옳다고 확신이 든다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할 용기를 낼 것이다. 그리고 에릭슨의 발달단계에 의하면 이 자아정체성을 형성한 이후 다음 단계 성인 초기 습득하는 덕목이 ‘친밀감’이라고 한다. 즉 이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 대인관계에서도 명료한 경계를 갖고 중심있는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가까이 할 사람을 가까이 하고, 멀리 두어야 할 사람을 멀리 할 수 있는 힘이 결국은 자아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회가 점점 다원화되어 가면서 다원주의(Pluralism)와 상대주의(Relativism)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현대와 같이 다문화가 혼재하며 공존해야 하는 사회에서 다원주의적 태도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로 발현될 수 있다. 자신의 분명한 입장과 태도가 있다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태도는 무례하며 심지어 폭력적일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태도는 자신의 입장을 지니면서도 타인과 타문화를 수용하며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다원주의적 태도가 상대주의적 태도는 아니다. 상대주의는 자신의 중심이 없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옳다고 이야기하다가, 다른 경우에는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변덕스러운 태도가 나타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태도를 갖는 윤리성을 지녀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중심 없이 흔들리는 명분 없는, 상대주의적 태도는 아닌 것이다.
명분을 지니면서 다원주의적이며 수용적인 태도를 지닌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거절하는 능력으로 발휘된다. 거절할 수 있는 힘은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따르지 않겠습니다’와 같은 태도, 이것이 기독교인의 명분있는 태도인 것이다.
화합과 조화를 이유로 기독교인의 구별성이 점점 퇴색해가는 세태를 본다. 팥죽 한 그릇을 파는 행위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는 변명이 공감으로 포장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면 분명 어둠과 구별되어야 하고, 짠 맛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타협할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태도를 우아하게 주님의 덕을 세우며 표현할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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