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여!’하며 나오는 탄식을 속으로 삼킨다. 왠지 두툼한 그의 주머니에 식칼이라도 품고,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둘러 쌓인채 온화하게 ‘알았다. 그렇게 해줄게’라고 답변하고 그냥 그를 그냥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이들을 사랑해야 하는 부모다. 승환이를 만난 후, 나는 회개를 많이 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단순히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아닌가? ‘나는 목자인가 삯꾼인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정해놓고 기도하는 ‘답정녀’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나님께 기도로 나가지만 기도제목을 가만히 보면 응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 자신이 정한 기도응답과 다르다는 이유로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기도의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철남이가 무릎을 꿇고 나에게 용서를 빈다. 그가 용서해 달라는 것은 ‘F’를 면케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실망시킨 것에 대한 죄송함도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진심 어린 죄의 고백이었다.
백부장 – 하늘 연리지
왜 기독교는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죠? ‘기독교인은 배타적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내용인가? 태도인가?’를 말이죠. 먼저 내용에 있어서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지식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타협할 수 없는 지식 내용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1+1=?’를 생각해 볼까요? 답은 2입니다. 1이 되거나 3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지식은 배타적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확실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걸까요? 예,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태복음 20:28b, 새번역). 우리는 죄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유일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심으로 죄는 박살났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을 채우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망가진 이 세상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 여행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신 하신 일’을 기억하는 여행입니다.
정석원 –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해
선교적 신학의 출발점은 선교적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교와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좀 더 고전적인 신학적 표현을 따르면 선교가 하나님의 속성임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남아프리카의 선교학자인 데이비드 보쉬에 의하면 “선교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달리 말해 자주 반복되는 저명한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말처럼 “세상을 향해 수행해야 할 구원의 선교는 교회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한 아들의 성령의 선교인데 이 과정에서 교회를 세우고 포함한다” 이와 같은 확언은 20세기 세계 교회 운동에서 중요한 발전 중 하나이다. 이는 이 담론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신학적 전통과 교회 전통 사이에서 교회의 선교는 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광범위한 합의에 따라 형성되었다.
존 R. 프랭키 – 선교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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