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스텐리 크레이그 토플(한국 이름 도성래)은 1932년 미국 시카고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모리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한센병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코크레인 박사를 만나 한센병에 관심을 갖게 된 후 1959년 한국 여수에 있는 한센인 수용소 예양원에 미국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부임했다.
1965년 애양원 제10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애양원 내 현대식 병원을 지어 한센병 환자와 일반 환자의 통합진료를 도입했고, 이동진료팀을 운영했으며, 한센병 완치자들이 자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1970년대부터는 소아마비 환자의 후유장애 치료와 재활 수술도 진행하며 이들의 사회 정착을 위한 재활직업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1981년 22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1990년부터 70대에 은퇴하기까지 케냐, 소말리아, 탄자니아 등지에서 신체장애인들의 재활치료에 헌신했다.
이기섭 작가는 닥터 토플의 생애, 사역에 관해 이야기로 엮어 본 도서로 집필해냈다.
저자는 책 속에서 “푸른 눈의 서양 의사가 그를 맞이했다. 일종의 면접인 셈이었다. 다른 의사들은 장갑을 끼고 온몸을 가리는 위생복을 입고, 되도록 환자와 멀리 떨어져 진찰하기 위해 튜브가 긴 청진기를 쓰는데, 그는 놀랍게도 맨손이었다. 그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물었다. ‘예수 믿으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사내는 눈을 껌벅거렸다. 사내는 예수를 몰랐다. 그러나 애양원에는 꼭 들어가야 했다. ‘예…… 여기 오면 한번 믿어 보겄십니더.’ 그의 솔직함에 의사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참 반갑습니다. 예수 믿으면 좋습니다.’ 그렇게 사내는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애양원의 삼중 문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 사람들이 수용소라고 부르는 곳의 입구였지만 나병 환자들에겐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닥터 토플은 그날 아침부터 두 건이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토플은 두툼한 털목도리를 두르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손을 소독하려고 하니 수술실의 외과용 물비누도 얼어붙어 뻑뻑하게 나왔다. 첫 번째 수술은 ‘발이 늘어지는’ 족하수 환자에게 힘줄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십 대 소년의 절단된 팔의 신경을 잇는 수술이었다. 첫 번째 수술은 척추마취를 할 수 있어 석유난로를 틀었지만, 두 번째 수술은 화재 위험이 높은 에테르를 사용해 전신마취를 해야 했기에 난로를 껐다. 토플은 손가락이 시렸지만 절단된 신경을 잇느라 점심도 거른 채 수술에 매달렸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닥터 토플의 수술이 저렴하면서도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원에는 소아마비, 골수염, 골관절 결핵, 외상과 화상으로 인해 장애가 생긴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치료나 교정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중증 뇌성마비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간절했다. 그들은 닥터 토플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들은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닥터 토플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야 했다. 수술을 하면 정상인처럼 되리라는 큰 기대를 걸고 온 소아마비 환자들에게도 토플은 변형된 팔과 다리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 ‘우리 의사들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그 형태로 회복시키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수술로 외형과 기능을 조금 향상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마비된 다리로 기어다니던 아이들이 보조기를 차고 일어서고 한 걸음씩 걷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