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열심이 있는 신앙 왜곡은 두려운 것
외형 비슷하지만 생명력 없다는 것이 핵심
어리석은 자는 끊임없이 배우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해
'참 자유' 없이 죄책감과 욕망의 양극단에서 몸부림
경건의 능력는 우릴 자유케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가 지난달 30일 주일예배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사람들”(디모데후서 3:5-9)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화종부 목사는 “말세는 고통하는 때다. 말세는 예수께서 오심부터 예수가 다시 오심까지의 기간을 말세라고 부른다. 이 말세에 아주 중요한 특징은 사랑의 왜곡에 있다”며 “사랑의 대상에서의 왜곡과 사랑이 방향을 잡고 향하는 부분에 왜곡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그 사랑 대신에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되는 그 자리에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사랑의 왜곡'이 말세에 아주 중요한 특징”이라고 했다.
이어 “그 결과로 많은 관계의 어그러짐이 생겼다. 가족 안에서 제일 중요한 가족이 깨뜨려지기 시작하고, 부부 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지면서 너무나 공동체가 무너지고 많은 악행들이 자행된다”고 했다.
화종부 목사는 “말세의 중요한 현상 중의 하나는 신앙의 왜곡이 온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부정하게 되는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바라보면,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은 반드시 붙어 있어야 된다”며 “이건 떨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반드시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이 같이 있어야만 이게 기독교 복음 혹은 예수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새생명의 놀라운 사건인데, 말세가 되면 이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부정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말세에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이것들을 부정하면서 얼마든지 둘이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경건한 모양과 경건한 능력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어리석은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선지서에 보면 선지자들이 제일 많이 비판했던 것도 이런 내용이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기도를 하는데,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손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때 생기는 제일 중요한 열매는 경건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범사에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다양한 일들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예배를 한번 잘 드리고 예배가 은혜가 있고, 뭔가 감동이 있으면 되는 그런 백성들이 아니라, 그 은혜와 감동을 그대로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일터로 돌아가서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범사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묻어나도록 사는 바로 그것이 경건”이라고 했다.
화종부 목사는 “이번에 제가 미국 LA에 잠시 갔을 때, 한 목사님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들 대통령이든지 정치가, 영화배우, 스포츠 스타든지 다양한 인물들을 거의 실물 크기와 비슷한 밀랍 인형을 모아 놓은 ‘마담 투서’라는, 그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했다”며 “바깥으로 보면 실물이고 크기도 비슷하고 외모도 어지간히 닮았지만 핵심이 무엇인가? 생명은 없는 것이다. 경건한 외적인 모양을 담지하는 내면의 생명력, 역동성 생명이 있는 데서 오는 능력과 참된 변화가 있을 때, 경건의 능력과 경건한 모양이 함께 붙어 있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른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오늘 본문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을 향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내가 돌아서라 단호하게, 아주 단호하게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런 교훈을 누구든지 가르치거나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신앙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담대하게 거절하고, 할 수만 있다면 출교해서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돌이키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안 믿는 자들을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을 나누고 말로만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자들이다. 어리석은 교훈을 가르치고 붙들고 있는 자를 단호히 거절하고 등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심하게 할만큼, 타협점을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말세가 이렇게 아픈 것은 신앙도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면에서 하나밖에 없는 길인 신앙도 왜곡이 되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과 경건의 모양을 분리시킬뿐 아니라, 그런 상태로 종교적인 열심까지 낸다는 것이다. 참 너무 두렵다”라며 “내용은 다 빠져 있는데 종교적인 열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 중에 하나”라고 했다.
화종부 목사는 “모양과 내용이 분리되는 것도 너무 아픈 일인데 이런 상태에서 열심을 막 낸다는 것이다. 6절에 ‘어떤 자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림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 사람들이 경건의 능력과 모양이 나누어져 있는 상태로 뭐 하는가? 그 어리석은 여자를 전도해서 자기들에게로 데려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어리석은 사람'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작은 자', 즉 작은 상태로 있는 사람을 뜻한다. 성장해서 이제 제법 덩치도 크고 지각도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안 하고 여전히 작은 것이다. 그래서 변별력도 현저히 떨어지고 너무 어리석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작은 자를 꾀는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가만히 들어가서 그들의 영혼을 노략질한다.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 즉 '작은 사람', 자라지 못하고 작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는가? 유인한다”라며 “여기 ‘유인한다’는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이다. 말하자면 함정을 쳐놓고 거기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군사 작전을 할 때 전쟁을 치를 때 상대 적군들을 유인해내는 그 '유인하다' 할 때, 그 군사 작전 용어”라고 했다.
이어 “군사 작전을 하듯이 아주 치밀하게 꼼꼼하게 잘 계획을 따라서 그 사람을 유혹해서 유인해서 마침내, 그 어리석고 미련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꾸민다. 경건의 능력과 경건의 모양이 쪼개져 있는 그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 '거짓 선생'들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화종부 목사는 “진리의 지식에 여러분이 이루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는가? 죄를 깨닫게 된다.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우리 예수 우리의 모든 죄짐과 모든 비참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다시는 죄 중에 정죄함이 없는 참 ‘자유함’ 안으로 들어간다. 끝없는 자책과, 자기 능력과 실력으로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와 은혜 때문에 우리같이 일한 것이 없고, 자격 없고, 공도 없는 자들이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에 근거해서 다시는 정죄 아래 머물러 있지 않은 참된 죄의 사슬과 용서에 자유를 주는 것이, 진리의 지식이 우리를 데려가는 지점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했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거짓 선생에게 부지런히 배우는데 어떻게 됩니까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그 사람은 죄를 중히지고 정죄감의 짓눌리는 것이다. 한쪽에는 끝없는 정결함에 대한 압박에 짓눌리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뭐가 있는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다니고 있다. 한쪽으로는 ‘정죄감’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욕망과 욕심’에 끌려서 종노릇을 한다. 진리의 지식에 딱 이루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씻음과 용서에 자유가 뭔지를 알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안에 이긴바 된다”고 했다.
그는 “물론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이긴 바 되는 싸움이 일어나고 때로 이기기도 하는 경건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미련한 사람은 끝없는 ‘정죄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똑같이 또 다른 한쪽으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끝없이 끌려가는 어리석은 삶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지식에 그렇게 많이 배우는데 진리의 지식에 이루지를 못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보게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참된 진리의 지식은 사람의 마음에 찔림과 가책만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 가책과 양심에 찔림이 일어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 깨달음을 근거로 우리의 죄를 다루어 내신 구주의 공로를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며 “그 무거운 죄짐을 주님께 맡기고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뭔지를 아는, 그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자유를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참된 진리는 여러분과 저를 새 사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죄로 어머니 모태로부터 죄 중에 태어났던 우리를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우리의 내면을 빚어서 거룩하고 고상한 인격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담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내는 것이 참 진리의 목적”이라고 했다.
화종부 목사는 “거짓 교훈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돈이다. 거짓 교훈의 목적은 돈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안위에 있기 때문에 나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끝없이 끝없이 배우지만 그래서 무슨 체험도 하는 것 같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그 정죄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과 끝없는 죄의 욕심들을 끝없이 끌려가면서 정죄감을 반복하고 있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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