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두 번째 성경적 의미는 ‘아바드(Abad)’다. ‘아바드’는 구약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그 뜻은 ‘섬기다’(창 14:4, 출 9:1, 출 21:6), ‘봉사하다’(창 29:25, 민 18:2, 사 19:21, 렘 44:3), ‘일하다’(창 30:26, 출 5:18), ‘시키다’(출 1:41), ‘갈다’(삼하 9:10, 렘 27:11), ‘경배하다’(사 19:21), ‘처리하다’(민 4:10), ‘행하다’(창 20:9, 사 28:21), ‘수고하다’(사 14:3, 겔 29:18) 등이다.
‘아바드’라는 말은 본래 노예나 종의 노동을 의미했다. 그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장면을 나타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출 5:18) 그런데 이 용어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제물을 드리는 봉사와 레위인들의 회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 그리고 봉사하는 일 등을 의미로 확장되었다(출 9:1, 민16:9, 18:2). 그리고 여호수아 24:14-15에 나오는 ‘섬기다’가 ‘아바드’다(수 24:14-15).
출애굽기 3:12의 ‘아바다’도 또한 ‘섬김’의 의미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종이나 노예의 노동을 표현하고 있는 ‘아바드’가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야기할 수 있다. 종이나 노예가 주는 뉘앙스는 충분히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나 노예의 신분, 혹은 그들의 험난한 노동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종이나 노예가 일을 할 때 갖는 기본 자세, 즉 자기 주인을 모실 때의 마음이다. 그들은 주인을 향해 절대적인 복종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인만을 주인으로 삼는 자세를 겸비해야 했다.
예배자인 우리에게도 종, 노예와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주님만이 주인이 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절대적인 복종으로 주인을 섬겼듯, 절대자를 향한 ‘경외심’이 예배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바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예배자의 자세이다.
예배자가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행동으로 자연히 이어지게 된다. 곧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행위는 예배자가 지닌 마음의 결과이다. 또한 예배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삶의 전반에 실천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바드’라는 용어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아바드’가 ‘일’, ‘행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실천과 행동으로 직결되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조금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이루는 다양한 ‘일’들 역시 ‘예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 이것이 ‘아바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예배의 모습이다.
세 번째 성경적 의미는 ‘레이투르기아(Leiturgia)’다. ‘레이투르기아’는 ‘사역, 직무’(눅 1:23, 히 8:6), ‘섬김’(히 9:21)의 의미로 기본적으로 ‘백성을 위해 일하다’, ‘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어 ‘아바드’가 헬라어로 번역된 단어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지금의 공무원과도 같은 국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직무를 수행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이 말이 성경 안에서도 ‘섬김’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히 9:21)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표현하는 말로 성경에서 사용되기도 했다(히 8:6).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1:23)
우리가 잘 아는 단어인 영어의 ‘예전(liturgy)’이 이 말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레이투르기아’에 ‘섬김’의 의미와 더불어 ‘의식, 예식’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의식은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개개인이 드리는 행위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일임을 이 단어는 잘 알려주고 있으며 동시에 공동체의 의무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예배는 공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히 이 말은 후에 기독교 예전 가운데 특별히 성례전 의식이나 기타 다른 의식을 집례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일을 하고자 하고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레이투르기아’는 예배가 곧 우리의 직무이며 직임임을 표현해 주고, 이로써 우리에게 예배에 대한 보다 분명한 책임 의식을 갖게 해준다. 물론 예배가 일 처리하듯 드려야 할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 우선적인 것이며 책임을 다해 드려야 할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배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양보되어야 한다. 너무나 분주하게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예배가 세상에서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을 일로 전락할 때가 있다. 그런 우리에게 ‘레이투르기아’는 우선적인 우리의 본분에 대해 다시금 강조해주고 있다.
예배는 나 혼자서, 어디서든 드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공적예배의 시간이 주어져 있고 ‘레이투르기아’라는 말 역시 공동체가 함께 의식을 통해 예배하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예배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모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한 아버지 안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서로가 화합한 가운데 예배가 드려지는 것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이를 위해 질서와 형식이 예배 가운데서도 필요하고 이를 잘 지키기 위해 순서를 정하고 각자의 맡은 역할을 규정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예배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 예배하기 위해서 질서를 마련하는 것은 예배의 준비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으로 치닫는 것은 배제하되,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서로가 마음과 뜻을 나누어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레이투르기아’는 우리에게 그 공동체성과 질서에 대해 다시금 강조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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