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생각할 때, 복음은 자연스럽게 ‘넘치는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 넘치는 기쁨은 교회 안에서 더 커진다. 우리는 그 기쁨을 교회 안에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이 기쁨(고난 중에도 느껴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기쁨)은 독특하고 강력하며 희망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교회에 슬픔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슬퍼할 때에도 기쁨을 퍼 올릴 수 있는 기쁨의 우물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우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후 6:10).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이 구절은 모든 교인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만큼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환대를 받고 그분의 가족이 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예수님은 우리를 은혜로, 기쁘게, 온전히 받아 주셨다. 이제 교회에 속한 우리는 복음을 중심에 둔 공동체, 신자들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토니 메리다 – 교회 사랑 설명서
우리의 비밀들을 알고도 변치 않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외에 없다.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도 여전히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다른 이는 없다. 오 하나님, 주님이 나를 앞뒤로 둘러싸십니다. 주님이 내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손이 너무 무거울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얹으시는 하나님의 손이 상처 입은 손이라면, 우리의 허물로 인해 상처받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다친 손이라면 어떨까? 하나님이 빅브러더처럼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살피신다면 어떨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인격체로서 여러 능력을 맡기시는 일을 합당하다고 여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언제 누구에게 부여할지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분에서 늘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관심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정작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은 무시한다. 이미 배부른 사람들에겐 많은 것을 주면서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인색하게 군다. 칭찬의 말 한마디가 아쉬운 사람에게 칭찬을 아끼는 식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대를 깔보는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받는 사람 쪽에서 차라리 우리가 그들을 모른 척하기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Jr. - 하나님의 날개 아래
내가 삶에서 여러 번 깨달은 것이 있다. 때로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이끄시는데, 그것은 나를 위한 ‘더 높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여러 해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기쁨 중 하나를 말해보라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땅에서의 날들을 가장 복되게 해주는 것은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에게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불이 내려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의 신성함 속에 푹 빠지게 할 때까지 경배에 몰입하는 것이다.
A. W. 토저 – 하나님 임재에 압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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