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 (행5:21-28)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5:29)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가로막는 권력의 위협을 정면으로 받아 쳤다. 물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권위에 순복 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오용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명한다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금한다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 국가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된다. 여기서 사도들은 교회의 “사회적 불복종”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생명의 말씀을 높이고, 생명의 말씀을 찬양하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그만큼 이 일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본질인 것이다. (지상 명령) 이 세상에는 이 일을 제한하거나 방해하거나 가로막을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전한 생명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말씀이었는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5:30-31)

하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우리의 왕과 구주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으셔야만 했으며, 또 죽은 예수를 왜 다시 살려내셨는가? 듣는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제자들이 전한 생명의 말씀은 다름아닌 “구원에 관한 진리”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하며, 그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은 왜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게 하셔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인가?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화목”이라는 개념이다. “화목”이라고 하는 개념은 구약의 “속죄 제사”에 관한 규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계시되었다.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 낸 것같이 떼어 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27-31)

“속죄”란 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화목”은 속죄를 통하여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게 된 것이다. 즉, “화목”은 “속죄 제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결과다. 죄인의 죄를 제거하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켜 드리는 것이 “속죄 제사” 안에 담겨진 “화목”의 개념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구약의 속죄 제사는 그것 자체로서 완성된 제사가 아니라, 모세가 이 제사법을 받은지 약 1,50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될 십자가 제사의 모형이요 예표였다. (마치 700년 전, 1000년 전 2000년 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셨듯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1500년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신 속죄 제사법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담겨진 구원에 관한 진리를 이미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약의 속죄 제사와 그 안에 담겨진 “화목”의 개념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전한 생명의 말씀, 모든 설교의 핵심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이것이 모든 인간의 실존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거하게 되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 문둥병자, 혈루병자, 과부, 고아, 앉은뱅이, 소경, 사마리아 여인, 사랑하는 딸과 오라버니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의 비참한 실존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병들어 죽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의 죽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증거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죄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3:10-15)

인간의 죄를 총 5개의 비유로 설명 하시는데 그 중 4개가 “사람의 입”과 관련되어 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그리고 마지막이 “발”이다. 죄인들이 저지르는 죄는 바로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약3:2-3)

우리의 “혀”가 우리의 “몸”을 제어한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3:4-6)

말 한 마디 때문에 삶의 수레바퀴가 불살라진다. 그리고 그 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불이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삶이 지옥이 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3:7-8)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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