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한가? 십계명은 명한다: “살인하지 말라”(출20:13)
인류 역사를 뒤돌아보면 크고 작은 전쟁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 전쟁 당사국들과 지휘관들과 전쟁에 동원되거나 참여한 병사들은 지금 치르는 전쟁은 불가피하고, 자유와 정의와 평등 같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신성한 의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민족, 국가, 자주독립, 정치 경제적 가치이념, 신앙적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 의로운 전쟁, 거룩한 전쟁이라는 주장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전쟁은 정말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인 것인가? 전쟁으로 인해 죽은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죽음을 대신할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명분 있는 전쟁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현실론자들은 전쟁에 대하여 인간다운 삶과 가치를 지키고 지속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현실적 지불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는 정의롭고 신성한 전쟁이 당연히 있는 것이며, 그 현실을 직시하지 아니하는 모든 이상주의자, 평화주의자, 관념주의자들이야말로 무책임하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방할 것이다. 현실론자들은 ‘거룩한 전쟁터에서 희생한 고귀한 피 값’을 폄훼하는 무책임한 평화주의자와 화해주장자들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될 존재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렇다. 인류 전쟁 역사를 뒤돌아보면, 전쟁에는 ‘의로운 전쟁, 거룩한 전쟁’도 있었고, 그러한 전쟁에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영웅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0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의로운 전쟁’이라 간주되는 사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국제연합군이 동맹하여, 독일 히틀러 제3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맞서 싸운 경우가 될 것이다. 독재자 히틀러의 전쟁 광기를 방치할 경우, 죄 없고 힘없는 아이들과 부녀자들의 희생이 하루에만도 수만 명씩 비인간적으로 죽어가는 현실은 무력을 행사하여 중지시키고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그 자체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보다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보다 작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우리는 ‘의로운 전쟁, 혹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판단한다. 정의롭고 의로운 전쟁에서, 짐승 같은 악당들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중단시키고 선량한 마을 사람들, 시민들, 국민을 지키고 살려내려면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평화 쟁취와 유지”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것이 미국 서부 개척사 드라마에서부터 오늘날 세계 최강국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대외정책 기본이고 현실적 책임정치의 본질이다.
그런데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사회가 불안해지고 정권이 위태로울 때는, 흔히 호전론자들과 정치가들은 국가, 민족, 애국, 이데올로기, 종교, 기업 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온갖 매스컴과 어용학자를 내세워 시민의 사리 판단을 마취시키고 ‘일전불사’(一戰不辭)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상대적인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 거룩한 전쟁’이라고 미화하며 주장한다.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의 한 번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들을 전쟁터로 몰아내어 죽게 만들고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만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이 흘러 지나고 뒤돌아보면 진정 만부득이한 ‘정의로운 전쟁, 거룩한 전쟁’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전장터에서 죽은 자들만 불쌍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히히닥거리며, 지난날 죽기 살기로 싸우던 적국끼리는 다시 경제교류를 하며 금송아지 ‘아론의 우상’을 만들고 광란의 축제를 서로 즐긴다.
정직하게 양심의 명령에 귀 기울이고,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차적으로 순종한다면 “살인하지 말라! 지구보다 더 귀중한 사람 생명을 죽일만한 가치 있고 명분 있는 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은 없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정치경제이념과 국가 제도가 있는 것이지 그것들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준엄한 하늘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모든 전쟁은 인간 죗값으로 일어나는 살인 행위이고, 거룩한 전쟁은 없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확고하게 증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 살인, 폭력, 전쟁무기는 용납되는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
전쟁은 권투 시합처럼 안전 장갑을 끼고 직접 힘과 기량을 겨루는 시합이 아니다. 전쟁의 성패는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새로운 살상 무기를 개발하여 상대방 군대와 적국인들을 쉽게 몰살시키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인류 문명사는 전쟁무기 발달역사다.
“우리가 참여하는 전쟁은 의로운 전쟁, 거룩한 전쟁이다!”는 확신을 가질수록 가공할만한 무기개발과 그 사용으로 인한 인명 살상에 둔감해지기 쉽다. 2차대전 중 런던 시내를 무차별 폭격하는 독일군의 무인장거리 유도탄(V2), 북한 인민들의 경제생활 궁핍은 뒤로 제쳐두고 온 국력을 쏟아붓는 북한당국의 원폭 미사일 개발실험의 광란, 요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터에 쏟아붓는 포탄, 대포, 전자, 비행기 등은 흔한 토막 뉴스거리에 불과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폭력과 무력 사용에 대한 예수님의 신념은 확고하고 분명하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들이닥친 불한당 하수인들은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예수 선생을 포박하려 했다. 이를 본 제자 중 마침 칼을 지녔던 베드로가 칼을 뽑아 단칼에 불한당의 귀를 잘라버렸다. 요즘 말로 하면 ‘정당방위요 의로운 전쟁’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에게 하신 명령은 엄숙하고 단호하였다.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 칼을 든 자는 칼로서 망하느니라!”(마26:52). 왜 그럴까? 무기를 사용하여 살상하는 폭력행사는 마음에서 일어난 증오, 미움, 분노, 보복심의 표현이요, 폭력은 다시 폭력을 부르고 폭력적 무력 대결은 결국 살인과 공동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요즘 크림반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가공할만한 무기 경쟁과 군사력 증강의 광기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핵무기 시대에 전쟁은 민족이나 국가에게 풀 한 포기도 남지 않는 완전 초토화를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이 된다. ‘정의로운 전쟁 현실론’은 2차대전 시대까지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고부터는 적군이나 아군이나 가공할 핵무기를 지닌 현실에서, ‘정의로운 전쟁론’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쟁현실론은 의미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결국 모두 죽고 녹색 지구행성에는 핵 오염물질과 ‘공동의 인류파멸’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 스스로 속이지 말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미국 시카코대학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자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이다. 그는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다음을 강조하였는데, 곧 한국전쟁에서 ‘기원’(起源, origin)과 ‘시작’(始作, beginning) 개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스탈린과 모택동의 은근한 사주와 격려를 받은 북한 공산당 김일성 일당이 ‘남조선 해방전쟁’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시작한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동족 4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일으킨 역사적 책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의 기원은 사실인즉 해방정국(1945-1949) 기간 동안, 한민족이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 갈라져 싸운 ‘민족 내전’에 그 기원이 있다고 커밍스 교수는 그동안 비밀로 금지되었던 각종 사료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주장한다.
일본멸망 직후, 한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무정부상태를 막기 위한 빌미로 소련군과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힘없는 한민족과 한반도는 새롭게 등장한 냉전 시대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된 것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특히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분단시킨 건 내 조국 미국이었다”라고 커밍스 교수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한민족 마음이 분열했기 때문이었고, 좌우파 정치야심가들의 정치 주도권 싸움 때문이었고, 북한 땅에서 종교박해를 경험한 한국 기독교가 증오심과 보복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때문이다.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려조, 조선왕조. 일제시대 통합 1,000년 역사 기간 동안 왕족들과 귀족들과 양반들과 세도가들에게 천대멸시 받고 수탈당하고 억울하게 매 맞고 옥살이 당했던 이 땅 한민족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쌓였던 증오심, 보복심, 원한, 그리고 권력욕과 탐심이 집단적 무의식 심층을 뚫고 역사의 지표 위로 터져나온 죄악의 화산폭발이 아니었을까? 근본 원인 진단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왜 70년이 넘도록 종전, 평화협정, 남북 교류, 점진적 평화통일이 되지 않는지 3가지 근본적 이유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들이 종전, 평화협정, 한반도 평화통일을 원하지 않고, 분단상태를 지속하여 한민족과 한반도를 그들의 최전선 방패막이로 그리고 충돌 방지 윤활유처럼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남북한 정치, 경제, 문화 기득권자들이 남북한 사이에 긴장 상태를 지속하여 ‘국가안보’를 빙자한 ‘적과의 동침’을 지속하려 하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를 명분 삼아 수많은 민주열사, 언론인, 지성인, 노동자, 기업인이 희생당하고 통제되었다.
셋째는, 깨어서 역사 현실과 미래를 열고 나가야 할 이 땅의 종교, 언론, 정치, 대학 지성들의 양심과 지성이 병들고 썩었고 타락하여 ‘아론의 금송아지 광란 축제’를 지속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은 공동으로 다 함께 망하게 되어있다. 오직 하나의 살길은, 남북 8,000만 민족 구성원이 각자 속눈을 뜨고, 역사를 꿰뚫어 보고, 서로 참회하며 용서하고, 하나 되어 함께 살려는 ‘민족적 거듭남이라는 마음의 대혁명’이다. 이것만이 한민족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성경은 예수 생명 안에서 일어난 십자가의 대속적 자기희생과 용서하는 사랑의 용기만이 전쟁을 그치고 인류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