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예수님처럼 돼라”는 말은 명령이다. 일신론을 믿는 우리의 사촌뻘 되는 종교들이 이 본문을 똑같이 읽고 가르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예수님은 좋은 교사이시며, 그분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잘 살고, 옳은 일을 해서 하나님께 더 많은 호의를 얻어 내려고 애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전통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라”는 식으로 추구하고 가르칠 수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여전히 ‘비기독교적’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다. 성경을 읽지만(기록된 글자) 복음은 놓치는 것이다. 복음은 성육신한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모든 본문과 이야기와 명령,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삶에 끼치신 영향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축소시키고 있다.
벤 코널리 – 복음 중심 성경 읽기
제자도는 어떤 과정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형성해가시도록 내어드리는 지속적이며 일생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새 신자들은 교회 문턱을 넘어서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만, 겨우 저녁 성경 공부반에 있는 자신들을 볼 뿐이다. 어느 해 참석했던 자정의 크리스마스 예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날 목사님은 성육신의 메시지를 성경 공부에 한 번 더 참여하라는 권유로 축소해서 전했다. 물론 그 설교자의 설교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인간 역사의 이 놀라운 한순간으로 포착한 것 이상의 뭔가를 고대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에 더 열심히 참석하는것”은 내가 잠을 미루면서까지 듣고 싶었던 메시지는 정말 아니었다.
엘리슨 모건 – 예수를 따르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 대신에 마르다의 입을 통해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1:26)라는 고백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자체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20:31)고 밝히고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이 헬라적 이방 기독교 안에서 가장 적절한 그리고 가장 모범적인 신앙고백 형태로 사용되며 정착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28장으로 구성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달리 예수의 ‘말씀’ 중심으로 ‘오경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마치 예수의 족보와 탄생 이야기가 1-2장에서 복음서의 서론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26-28장에서 단지 마태복음의 결론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누가복음의 경우도 전체 24장 중에서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19장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 이후에 소개되고있고, 요한복음의 경우도 전체 21장 중에서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주로 18-19장에서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수난 설화에 상당히 많은 분량과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분명히 다른 복음서들과 크게 다르다.
김득중 – 복음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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