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순간 우리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요? 많은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부르는 기간은 한없이 길어지고, 결국에는 세상에 우리 혼자일지 모른다는 현실을 온몸으로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의 간절함,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의 절심함에 반응하셨던 하나님, 그리하여 그들을 해방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여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일방적인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또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서로 동행하게 하시는 만큼입니다. 그 시간만큼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길동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안광선 – 놀고 있는 목사의 하루 묵상
신학은 세상과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선교를 위해 섬기는 것이 신학의 목적이다. 신학의 자리는 성도의 일상이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가운데 삶의 자리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그런 과정에 만난 하나님과 깨달은 진리를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나눈다. 이런 만남의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는 신학의 공동체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공동체이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에서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안건상 – 세상과 교회를 위한 신학 다시 세우기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의 말보다 생명의 말로 인식됩니다. 그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과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이시다” 같은 언급은 그 안에 없습니다. 생명의 말은 생명의 드러남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말은 존재를 표상합니다. “존재”는 언약의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서사합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일함은 그분이 하시는 것으로 서사되지 않고 그분 생명에 의해 펼쳐지는 것으로 서사됩니다. 생명으로 예수님의 서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함께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의 생명이 상술되고 이루어집니다. 함께의 생명은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랍니다. 성육신된 생명의 십자가 죽음은 땅에 떨어진 밀알의 죽음과 같습니다.
황두용 – 언약: 함께로 그리스도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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