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은 집요하기까지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무려 40년간을 광야에서 ‘율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애초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적이, 말하자면 ‘예수 믿고 복 받고 부자 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이방인들이 득실거리는 선교지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백성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 목적을 이해했다면, 그들의 고난이 40년간 지속될 이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예배당에 모여도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다면, 대면 예배가 회복된다고 한들 그 이전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코로나가 준 교훈 중 하나는,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다면 예배당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은 코이노니아의 회복이다.
채영삼 –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뿌리내리기
우리는 사도행전(The Acts of the Apostles)을 읽을 때 복음과 복음 전파에 대한 사도들의 열정, 그에 따르는 고난과 순교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다 보니 AD 2세기 요한행전, 바울행전과 AD 3세기의 안드레행전, 도마행전 등등의 외경들은 각 사도들의 전설적인 기적이나 평판에 거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그런 면들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의 주도권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님이며 실은 성령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성령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난날 동안 복음의 정의(definition)와 핵심 요소들(6 core contents)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강의와 저술을 해왔다. ‘복음’에 대하여는 먼저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바로 서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동질성과 기능론적 종속성의 삼위일체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른 하나님, 한 분 하나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또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이 이상의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보지 못했다.
이선일 & 이성준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수도원의 삶은 고사하고 종교의 가르침마저 역사 속 유물처럼 여기는 오늘날, 수도사의 일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삶의 방식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세속의 성취와 영광을 갈망하고 경배하지만, 그 욕망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욕망 추구가 자신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수도사의 일상이 재현하는 가치를 단순히 거룩, 경건, 겸손 같은 종교용어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그 가치는 잃어버린 교회의 시간,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데 있다. 종교의 쓰임새가 욕망의 부추김을 정당화하는 데 있지 않고 멈추어 서서 되돌아보는 데 있음을 보여 줄 때, 수도사의 일상은 회랑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이 수도회 운동들은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마지막 모습은 유사했다. 개혁 주체가 개혁하려던 대상과 똑같아지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한 개인이나 조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복되는 패턴이다.
최종운 – 수도회,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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