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4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4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으로 진행됐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6일 오후 제414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윤상림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기획이사, 연세대 객원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학술발표회에선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 미래목회연구소 연구원)·이종민 박사(부산장신대 겸임교수)가 발제했고, 임희국 박사(장신대 명예교수)·윤정란 박사(숭실대)가 논찬했다.

먼저, ‘관료 출신 양반들의 기독교 입교와 서울지역 초기 장로교회의 변화 연구: 연동교회, 안동교회, 묘동교회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 미래목회연구소 연구원)는 “1899년부터 1904년 사이 한성 감옥서(監獄署)에 수감되어 있던 김정식, 유성준, 이상재, 이승만, 이승인, 이원긍, 홍재기 등 양반 관료들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일이 일어났다”며 “이들 중 상당수는 출옥 이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 활동, 국민교육회를 비롯한 교육활동, YMCA로 대표되는 사회활동 등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연동교회는 교인 층의 구성이나 교회의 활동과 성격 등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이어 “연동교회가 시작된 동서(東署) 연화방(蓮花坊)은 효종대에 하도감(下都監)이 설치되고, 정조대에는 장용영이 설치된 이후로 19세기 말까지 군병들의 주된 거주 지역이자 이현(梨峴)시장과 연결된 지역이었으므로 연동교회 설립 초기 교인들의 구성은 중인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04년 이후 이상재, 유성준,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등 양반 관료들이 출석하면서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교인 층의 구성이나 교회의 활동과 성격 등에서 발생한 변화는 양반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1909년 북촌 지역에 안동교회를 설립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며 “한편으로는 장로 선출과 신분 갈등 문제로 이원긍, 함우택, 오경선 등이 10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1910년에 묘동교회를 설립하는 일도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4회 학술발표회
김일환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그는 “연동교회는 한성부 내 동부지역에 세워진 첫 번째 장로교회라는 역사와 1904년에 양반 관료들이 다수 출석하면서 교회의 분위기가 변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며 “1894년 8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예배 처소로 시작해서 1895년에 정식 교회가 된 연동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선교사는 그래함 리, 밀러, 기포드, 빈턴 등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기포드는 1895년 12월 이전에 연동교회의 첫 번째 담임목사로 임명되어 중간에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가 있기도 했지만 1900년 4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따라서 게일을 연동교회의 첫 번째 담임목사로 보는 기존의 견해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연동교회 초기 교인들의 신분이나 직업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연동교회 세례교인 명부」가 있는데, 이 명부는 1896년부터 1911년까지 교인의 신상을 기록한 것이어서, 1904년에 양반 관료 출신들이 출석하기 이전의 교인 구성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직업을 알 수 있는 160명 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 경신학교 등과 관련된 교사와 학생 73명(46%)과 선교사와 교회 관련 직업인 35명(22%)을 제외하면 상업 및 수공업에 종사하는 교인들이 42명(26%)으로 전체의 4분의 1이 넘으며, 갖바치 출신들도 10명이나 있었다”며 “1903년과 1906년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에 의하면 연화방은 여전히 군인 가구의 비율이 높고 상인 가구의 비율은 낮은 지역이었지만, 이례적으로 연동교회의 초기 교인들 중에는 무관이나 경무직 출신은 거의 없고 상인들이나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1907년의 연동교회 사찰위원의 명단을 보면, 사찰위원 전체 31명 중 26명이 북서(北署)에 거주하고 연동교회가 있는 동서 연화방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며, 고위직에서 하위직까지 전현직 관리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것은 1904년에 김정식,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등이 출석한 이후로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의 입교가 증가하면서 양반 관료 출신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위상이나 역할에 있어서는 지도적 입지를 갖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묘동교회의 분립은 연동교회의 3대 장로를 선출하는 문제와 관련한 갈등을 주요 요인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갈등은 신분 계층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며 “묘동교회의 분립의 책임을 이원긍을 비롯한 양반 계층 교인들에게 모두 돌릴 수는 없지만, 그들이 장로 선출 문제를 신분 계층의 문제로 인식한 것과 묘동교회의 분립이 신분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신분의식에 의한 갈등의 산물인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게일은 양반 교인들의 신분의식을 ‘양반심’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지역과 인적 구성에서 ‘양반교회’일 수밖에 없는 안동교회의 설립은 도성 북부의 미(未)복음화 지역을 복음화하는 목표에 있어서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며 “1911년 9월에 열린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제27회 연례 회의에서 상류층 지식인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다는 보고나, 1912년 여름에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의 새 교회당을 완공한 것에서도 성장하는 안동교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양반교회라는 정체성은 양반 교인들에게는 신분의식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양반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접근을 어렵게 하는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라며 “사람들이 안동교회를 ‘양반(佯半)교회’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안동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양반 관료 출신들이 대거 연동교회에 출석하고 이에 따른 연동교회의 변화와 묘동교회, 안동교회의 설립은 신분제가 해체되는 근대 전환기의 서울이라는 시대적, 지역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초기 장로교회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진 두 번째 발제에선 ‘6.25전쟁 시기 부산지역 기독교의 공존과 갈등, 1950~1953’라는 주제로 이종민 박사(부산장신대 겸임교수)가 발제했다. 이 박사는 “6·25전쟁 시기에 남한과 북한의 기독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었다”고 했다.

이어 “6·25전쟁 시기 피난지 부산에 설립된 교회는 모두 112개 처였다. 그 가운데 기독피난민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40개 처였으며, 전쟁 이후 4개 처가 추가로 설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설립된 피난교회를 지역으로 분류하면, 서울·경기지역 기독피난민에 의해 9처, 충청지역기독피난민에 의해 1개 처, 나머지 34개 처는 북한지역 기독피난민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북한지역 14개 노회 가운데 10개 노회가 남한에서 재건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로 보아, 6·25전쟁 시기에 세워진 피난교회는 부산 기독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기독피난민은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고, 부산지역 교회는 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지만, 지역 연고와 문화의 차이, 그리고 신앙 배경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피난교회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6·25전쟁은 민족의 아픔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 동남단 땅 끝 부산까지 복음이 확산되고, 부산지역 교회가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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