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심오한 말씀이라 쉽지 않은 『요한복음』, ‘예수’라는 이름이 237회나 등장한다. 이는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도 범접할 수 없는 횟수다. 마태복음 150회, 누가복음 89회, 마가복음 81회, 바울서신은 로마서 37회를 포함해 전 서신(13권)에 등장한 횟수가 213회, 가히 압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많이 쓴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이 ‘영롱한 보석’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보석, 문제는 이 보석은 보지 못한 채 성경 읽어봤다고 말하는 사람 많다는 것이다. 만일 보석은 캐지 못하고 돌멩이만 들고 “잘 생겼다, 단단하다” 그러며 비교하고 자랑한다면 그건 웃기는 일 아닌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더 깊이 깨닫고 더 깊이 만나게 하는 ‘성경 중의 성경’, 그래서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을 ‘예수께 푹 빠진 복음서’라고 부르고 싶다.

성경은 연애편지를 읽듯이 읽어야 한다. 한 번 대충 읽고 말 내용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대충 읽고 만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가 아닐 것, 연애편지는 최소한 몇 번은 읽는다. 당사자가 아니면 내용이 유치할 수도 있고, 감동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너무너무 소중한 것, 편지 보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읽고 또 읽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도구, 하나님의 연애편지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만일 그 예수님을 아직 못 만났다면 이 시리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이미 만났을 경우 믿음을 더 강화하기 바란다.

요한은 기록 목적을 스스로 밝혔다. “내가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20:31). 요한이 선호한 단어가 ‘믿다’라는 동사다. 명사형인 ‘피스티스’가 아니라 ‘피스튜오’, 전부 동사형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 241회 나오는데 요한의 글에 107회 나오고, 요한복음에만 98회나 나온다. 또 ‘생명’이라는 단어도 36회 나온다. 계시록에 17회, 로마서에 14회, 요일서에 13회 나오는 것과 비교된다. 긴 여행을 떠난다. 요한복음 강해는 110회 안팎이 될 예정,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으면 보석을 캐게 될 것이다.

본문은 서시(序詩)의 시작 부분이다. 서시는 1절부터 18절까지인데 복음서 전체의 서론이자 요한복음 전체 내용의 요약과 같다. 그래서 라이트풋(R.H. Lightfood)은 이 부분을 “복음서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했고, 브라운(R.E. Brown)은 “초기 기독교의 찬송과 같다. 성육신하신 말씀의 생애를 엮은 복음서 기사에 붙힌 서악장(序樂章)과 같다”고 했다. 아마 요한공동체에서 쓰이다가 헬라문화 속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마지막에 서문으로 채택된 내용인 듯하다. 이 서언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로고스’(Logos)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나?’를 말씀한다. 서시 중에서도 3절까지만 먼저 나눈다.

태초에

요한복음은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창세기의 시작을 생각나게 하는 단어, 요한은 다분히 창세기 1장의 시작 첫 마디를 의도적으로 되새겼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휘황하게 등장한 ‘생명’, ‘빛’, ‘어둠’ 같은 용어를 쓴다. 창세기가 육신의 창조 이야기라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신(新) 창조, 즉 영적 창조 이야기다. 이 창조의 연결성 때문에 요한복음은 ‘제2의 창세기’라 불린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독자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작 말씀, ‘태초’가 대원인(大原因) 개념으로 근원을 뜻할 수도 있는데 만일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태초는 우연으로 가득했다” 이런 식이었다면 어땠을까? 기대감은커녕 얼키고 설킨 엉망, 흔한 드라마의 시작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전하는 창조 당시의 상황,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시작 부분이 이게 전부였다면 인생도, 생명도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황량한 바람 부는 사막이나, 화산 폭발과 불과 유황만 끝없이 계속되는 그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온통 혼돈, 공허, 흑암이었지만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3절), 이게 복음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 선포 후 온 천지의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공허가 생명으로 채워지고, 흑암이 빛으로 바뀌었다. 이게 창세기 1장이 전하는 창조 이야기다.

현대 과학은 우주가 빅뱅의 대폭발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어떤 것이 엄청난 크기로 팽창했고, 온도 또한 상상할 수 없이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약간 식었다고 하나 온도는 무려 1조℃, 38만 년 후에 우주 온도가 3000℃ 정도로 식으며 전자가 원자핵과 결합하며 원자 형성이 시작되었고, 3억년 후부터 별이 생기고, 138억 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날의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는 그로부터 대략 93억년 후인 지금으로부터 45억년 전에 생겼다는 것이다.

왜 생겼는지는 말을 못했다. 그저 우주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생겼단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절은 단호하게 ‘아니지’ 그런다. 그러면서 등장한 단어가 ‘말씀’이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 플라톤과 스토아의 세계관과 인간관에서 너무도 중요한 개념, 온 우주의 합리성과 생명을 주는 기본 질서나 원리(principle)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무질서와 우연이 아니라 질서와 목적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선언이다.

성경은 빅뱅 이전에 깜깜함이나 침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빅뱅은 혼돈이고 우연인가? 아니다. 말씀이 빅뱅을 감싸며 우주라는 생명과 질서를 만들어낸 것, 수백억 년의 시간도 말씀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말씀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혼란한 음들에서 각각의 악기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또 그 각각의 악기 소리를 엮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우주에서 이 하모니를 보고 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 보지 말고 이 말씀을 봐야 한다. 우연과 힘의 논리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 인생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다. 말씀이 없으면 태초도 의미 없다. 태초가 언제인가? 138억 년 전?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영겁의 시점? 138억 년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에게 진정 의미가 있는 날은 내가 태어난 날, 나의 생일일 것이다. 그것도 내게 의식이 생긴 때다. 달리 표현하면 말씀이 내게 임하면서 나의 우주가 시작된 것, 그래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면 우주는 아무 의미 없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했다고 한다. 구라지만 의미는 있다. 내가 최고라는 뜻이 아니다. 홀로 의식하고 홀로 해결해야 하는 인간 주체성의 선언이다. 내가 없는 한 우주는 의미 없다. 이것이 나의 태초다. 종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죽음과 함께 의식이 없어질 것이다. 그 후에 얼마의 세월이 흐르든 그건 의미 없다. 내가 다시 눈뜨는 그때까지는 의미 없는 거다. 핵심은 나의 생명의 안과 밖을 감싸고 있는 것이 의식, 곧 말씀이라는 거다. 그래서 말씀은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빛만 있다면 무질서와 어둠과 우연에 지지 않는다. 그래서 말씀이 임할 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다.

말씀이

요한은 로고스를 말씀이라 했다. 질서라 부르고 원리라 불러도 좋을 텐데, 아니면 그냥 아들 신이 있었다고 하면 될 것인데 왜 굳이 말씀이라 했을까? 말씀이 창조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빛이 있으라”라는 한마디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다. 시인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노래했다. 말씀은 단순히 능력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말씀’이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태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라”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깊이 감추인 생각이나 뜻이나 마음이 말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알게 되었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차제에 인간의 언어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는 도구라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마음과 사고하는 것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언어가 ‘나’라는 존재의 집이고, 우리 사회라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말 한마디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자천금(一字千金),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까지 있다. 이 말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말로 자신과 관계없는 호텔이 되게 할 필요는 없다. 포장할 필요도 없고, 가식 떨 필요도 없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하게 했다면 우리의 말은 품위가 있어야 한다.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나 감정을 끄집어 내는 말 때문에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가슴 아픈 것은 우리 사회가 너무 치열하게 말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진실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게 거짓말, 말은 진실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세상은 거짓말이 난무하다. 차라리 동물들의 세계는 진실하지만 인간은 위장하고, 아닌 체한다. 그 욕심이 말씀마저 이용하고 왜곡한다. 말은 진실성이 생명이다.

요한은 복음의 핵심을 ‘사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36회나 쓴다. 요한일서를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에 쓰인 횟수의 두 배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래서 진실성도 중요하지만 말에는 사랑이 담겨야 한다. 말은 원래 대화와 연대를 목적으로, 생명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에게 말은 흉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불행한 사회, 우리는 거짓과 폭력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찢어 헤치고 있는지를 매일 목격하며 지내고 있다.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 말 한마디가 우리 안에 있는 긍정과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말 한마디가 안개 속에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을 수 있다. 말 한마디 때문에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고, 말 한마디 때문에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길”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사건이 그 영혼을 울렸기 때문이다. 불가항력, 말씀에는 부활의 능력까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로 강력하게 밀고 들어와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계시니라’는 ‘지속적으로 계신다’는 말이다. 동사의 시상이 영원한 것, 불변의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이 창조 이전에 존재했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이것을 천명한 이유는 당시 사상가들이나 유대인의 상식이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은 강조하면서 말씀은 뛰어난 권위의 소유자이기는 해도 하나님께 종속적 위치에 있고, 피조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신다’는 함께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이게 사랑이다. 하지만 행동주의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지루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인생에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던 파우스트 박사는 책의 첫 장면에서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갑자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고 고치며 만족해했다. 당시는 행동을 중시하던 시대, 그들에게는 말씀이 정적이면 안 된다. 사랑과 고통과 쾌락과 지식과 권력과 신화의 세계까지 맛보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복지 낙원을 만들려는 계획으로 버려진 땅과 습지대를 개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말씀보다는 행동이 돋보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말씀이 근원, 말씀이 출발이다. 현대인들은 행동을 중시하다 얼이 빠졌다. 어느 선교사 말에 의하면 밀림 속을 안내하던 원주민이 갑자기 쉬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오늘은 쉬겠다. 그래야 영혼이 몸을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행동이 멈추는 경험을 했다. 그때 일상이 너무 그리웠지만 행동이 멈추니 우리 영혼이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적인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신다. 우리 내면을 살피게 하고, 우리 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내신다. 교회마저 행동의 전선에서 어떤 목표 달성에 목을 메고 효율성을 따진다면 그 생명을 잃을 것이다. 태초에는 말씀이 있었다. 교회는 빵이 아니라 이 말씀이 있는 곳이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고향이기에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는 말씀이시다.

인천 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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