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내용은 본서의 밑바탕에 깔린 논제로 연결된다. 첫째, 현대 바울 논의에서 바탕을 이루는 내용 중 다수는 19세기에 일어난 흐름 하나에 기원을 두는데, 이 흐름은 소위 새로운 바울 해석을 제시했으며, 그 해석을 통해 바울은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둘째, 이 시대 바울 학계의 주류는 19세기를 지배했던 사고에 반대해 그와 유사한 소위 역사에 근거한 저항을 개시했다. 이 모든 흐름의 중심에는 불트만이 있다. 불트만이 19세기에 시작된 흐름을 20세기 중반에 요약했고, 그럼으로써 21세기를 위한 질문을 제기했다고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내가 차례로 살펴볼 주요한 흐름 셋(샌더스, 마틴, 믹스에 초점을 둔)은 비록 서로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지만 모두 불트만에 대한 반응이다. 더 최근의 이런 흐름들이 본서의 주제이므로, 우리는 19세기 흐름이 일어났던 이유와 20세기 초에 남아 있던 그 유산이 20세기 말에는 역사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 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N. T. 라이트(저자), 최현만(옮긴이) - 바울과 그 해석자들
140년 전, 오직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사명감과 성령으로 무장된 수 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선교사라는 이름을 걸고 이 가난한 나라, 조선을 찾아왔다. 당시 조선은 풍토병이 만연하고 여성인권이 무시되고, 양반과 노비의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무지(無知)의 나라였다. 더구나 나라가 힘이 없어 호시탐탐 한반도 침략을 노리는 주변 열강들에 의해 신음해야 하는, 풍전등화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쇄국정책까지 쓰고 있으니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조선을 찾아온 선교사들은 그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따지지 않았다. 마치 흰 도화지에 각각의 색을 입혀 멋진 그림을 그려내듯 조선 땅을 전혀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의료와 교육, 문화와 예술, 정치와 제도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바꾼 파란눈의 선교사들은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사람들은 잠시 사역하다 돌아갈 자신들이 아니고 결국 우리 한국인 스스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덕영 – 복음의 빛, 한국을 살리다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을 건네주시는 하나님,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저희 마음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섣불리 판단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저희가 예상할 수 없는 사랑을 주시는데 저희는 저희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만 받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참 많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사람의 겉모습이 중요한 세상이에요. 사람들은 얼굴을 고치고 더 예뻐지는 것에 열심을 다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저희들은 외모보다는 마음의 중심이 중요함을 잊지 않아야 하겠지요.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예쁜 겉모습보다 속마음을 더 열심히 가꾸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오선화 – 엄마의 포웅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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