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 충실하고 청자들에게 적실한 실천에 도달하는 것이 설교 작업의 목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책무는 타당하고도 적실하게 성경으로부터 설교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공동체가 언약 갱신을 성취하도록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문단신학’)에 올바로 정렬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청중의 상황에 적용하는 일은 텍스트로부터 실천으로 진행하는 해석학적 이동의 절정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신자는, ‘본받음’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단지 예수님의 역사적 삶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연장한 것처럼 만듦으로써 예수님의 전체 삶에 전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본받다(imitate) 혹은 본받음(imitation)이라는 용어가 … 예수님이 그분과 관계된 이들에게 요구했다고 보도되는 복음서나 혹은 그 밖의 다른 글에 직접 등장하는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 쿠루빌라(저자), 이승진(옮긴이) - 본문의 특권!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그분에 대해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분이 자신을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분을 알고자 한 것이 내가 날마다의 삶에서 열정적으로 추구해 온 일이다. 우리는 진리를 단지 믿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그 진리를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내 힘으로 시도했던 것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내가 빠지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했을 때 그분은 정말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의 삶에서 그분이 이루시는 일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매일의 내 삶은 그분께 복종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속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성실하심이 나타나는 삶이다. 나의 불완전한 점들은 그분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완전하신 그분이 그분의 완전한 성품에 따라 일하시기 때문이다.
A. W. 토저(저자), 이용복(옮긴이) - 성령님을 추구하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 진실 앞에 서서 직면함을 말한다. 이 진실은 나의 한계(죄)와 나의 가능성(하나님의 은혜)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직면하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뼈아픈 어둠과 아픔이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회피하거나 힘 있는 타인에게 의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위험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직면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내 안에 있는 놀라운 잠재성과 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두신 창조의 힘을 만나는 것이다. 거짓된 나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짓된 나를 가지고 아무리 행복하려고 해도, 아무리 안정을 찾으려 해도, 아무리 완전하려고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낙타인 줄도 모르고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거짓된 내가 나의 전부인 줄 알고 있기에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내려놓을 가능성은 예수님의 초대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늘구멍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은 공간으로 초대하신다. 그 넓은 공간에 들어가서야 우리는 비로소 낙타 같은 거짓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곳은 하나님의 공간이다.
홍영택 – 나를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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