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찬양과예배학과 교수)

초대교회 이후 가톨릭 지역교회의 예배는 예식의 정형성을 갖추게 되면서 형식화되어갔다. 예식의 정형화는 초대교회의 자발성과 자유로운 성령의 역동성을 잃어가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 정책으로 교회는 특권의식을 가진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신앙생활은 형식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국에 침입한 야만족들의 개종과 더불어 중세 기독교사회의 형성에 공헌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중세 초기에 형성된 수도원 운동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연단의 시대 이후 교회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국교 선언으로 정부의 보호 아래 세속화되어갔다. 황제의 호의적 기독교 정책은 신앙과 세례의 의미도 모르는 특권과 권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몰려오게 했으며, 직업을 얻는데도 성직자의 추천서가 영향을 주었다. 이에 항거해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박해 당시에는 외부 세력에 대항해 신앙투쟁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세속화되고 형식화되어 영적 동력을 잃은 교회 생활에 대한 거부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영적 교제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제도화한 교회가 국가와 타협을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막과 광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반문화적, 비세속적 수도원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 수도원 운동은 금욕적인 생활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당시 철학사상도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풍부한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육체의 복종을 강조했으며,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기 때문에 참 자유를 얻기 위해 육체로부터 자유가 중요했다. 육체적 쾌락을 강조한 에피쿠로스 철학에 반대한 스토아 철학은 참된 행복은 정욕을 억제하는 데서 얻는다고 가르쳤고 견유학파(犬儒學派)는 자족의 원칙을 가르쳤다. 키니코스 학파 또는 견유학파(犬儒學派)는 자연과 일치된,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 운동, 또는 이를 따르는 철학자들을 말한다.

이러한 영적 움직임 속에 수도원을 창설한 사람은 이집트 코마(Cooma)에서 250년경에 태어난 안토니(Saint Anthony of Egypt, 251-356)였다. 그는 당시 아디나시우스와 콘스탄티누스를 비롯한 영향력 있는 사람을 포함해 많은 사람에게 영적 감동을 주었다. 이후 안토니의 은둔 수도원을 개혁한 사람이 파코미우스였으며, 그는 수도원의 사회성과 기여성을 더욱 강조했다. 이외에도 기둥성자 시므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 제롬(Jerome, 347-420) 그리고 널시아의 베네딕트(St. Benedict of Nursia, 480~547)가 초대교회 수도원 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중세 수도원 운동은 베네딕트에 의해 조직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원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던 극단적인 금욕생활과는 달리 자신들의 구원 문제를 넘어서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주력했다. 베네딕트는 당시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나 초인간적인 훈련 방법을 배제했으며, 지나친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도하며 일하라”는 명제를 내걸고 ‘노동’과 ‘명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중용적인 입장의 베네딕트 규율은 극단주의 수도원 운동을 보편적인 운동으로 대체하면서, 전 유럽에 퍼졌으며 중세 수도원의 중심을 이루며 부흥했다.

한편 사막의 교부들이 고행 훈련을 하던 시절에 수도원은 이미 교회의 일반적인 수행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항상 영성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성 어거스틴(St. 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목회 활동 중에도 영성 훈련을 하는 생활 속의 영성 훈련의 전통을 세웠다. 그는 수도원을 세워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현실에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세운 어거스틴의 신학은 중세 전기 수도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6세기에는 차츰 수도원이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이 수도원들은 일종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RM으로 알려진 ‘스승들의 규칙서’를 시작으로, 이후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집’인 RB가 있었다. 이 규칙집에는 기도와 노동, 순종과 개인의 양심,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독신생활과 공동생활, 기쁨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것, 엄격함을 행하는 데 있어서의 관대함과 신중함, 대인관계에서의 침묵과 사랑, 수도원장의 권위와 수사들의 견해 표명의 권리 등이 담겨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중시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중세 기독교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 그레고리 1세(Gregorius I, 540–604)다. 그는 어거스틴의 이상대로 수도사들은 관상에 힘을 기울이면서 때에 따라서는 목회로 나와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선교사로도 파송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 대제의 시대에는 제국 전역에 600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며, 수도원의 종류도 왕립 수도원에서 시골 수도원까지 다양했다. 7세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8세기에 극성기에 도달했던 수도원은 9세기 말과 10세기에 이르면서 일종의 제도적 쇠퇴기가 되었다. 세속의 왕과 영주들은 계속 사원의 재산을 통제했고, 자격 없는 성직자들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평신도를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또한 야만족들이 점차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거나 토착 민족들이 기독교화되는 시기로, 야만족들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원했으며, 기독교 개종이 활발했다. 개종과 더불어 교회에 토지를 바치고 그들은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에게서 땅을 받았는데 그것을 교회나 수도원의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도원은 오히려 교회나 수도원은 부가 몰리는 곳이 되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부패했으며, 이로 인해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 운동(Cluniac Reforms)이 일어났다. 하지만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수도원을 세속 권력으로부터 격리시킬 뿐이었다.

12세기로 들어서면서 차츰 학자들이 많아졌으며,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93-1109)는 초기 스콜라 철학자로 신의 존재론적 증명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단지 학문적인 깊이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이후 시토회의 수도사였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등이 등장했으며, 13세기에는 혁신적인 형태의 수도원이 다시 나타나는데 바로 탁발 수도원들이다. 탁발 수도원은 기존 수도회의 부패에 대한 반성으로 생겨났는데, 수도원이 속한 교구에서 수도사가 탁발로 생활하고 옷 이외에는 일체의 재산을 갖지 않았다.

중세 수도원 운동은 세속의 권력과 체계에 맞서서 일어난 영적 운동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의 역사와 흐름은 영적 운동이 세속과 결탁하게 될 때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초대교회 이후 교회의 권력과 사유화 등에 반대해 일어난 수도원 운동은 기독교와 예배 공동체가 세속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온전히 예배자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려는 영적 부흥 운동이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예배의 영적 정신을 이어받아 전승하려는 영적 갱신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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