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의원 김미애(국민의힘) 집사가 최근 CTS 간증 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에서 자신의 삶을 나눴다.
그녀는 어린시절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늦깍이로 공부했다. 결혼하지 않고 3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며, 변호사로서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 왔다. 최근에는 정치인으로 ‘입양법’ 등을 비롯해 다양한 법안을 발의하며 약자들을 보호하고 가정과 사회의 회복에 힘쓰는 것에 대해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들”이라고 했다.
‘한국장애인인권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삶이 계속 약자였다. 나는 약자들에게 도움을 줘서 자립할 수 있는 그런 선순환이 되는 것을 꿈꾼다”라며 “그래서 약자를 위해 살아왔다. 장애인에 대한 이동권 보호를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작년에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공공기관,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과를 냈다. ‘장애인인권상’을 받은 것은 그 이전에 일이지만, 늘 그런 일에 시선이 머문다”라고 했다.
# 힘들었던 성장 환경, 그리고 늦은 공부
김미애 집사는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라고 회상하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에 대해 “제주도 우도의 해녀 출신으로 바닷일을 하셨던 분이다. 여장부 같은 분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셨지만, 찡그리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하신 것을 본 적이 없다”라며 “자궁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시고, 굿이나 미신적인 것을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해보고 안 돼서 마지막에 교회에 갔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나는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전에는 아픈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다. 모든 예배 시간에 참석했고, 기도원과 새벽기도, 심지어 구역예배에도 갔다”라며 “어머니가 신음만 하면, 나는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주무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4년을 더 사셨다. 중간에는 다들 ‘기적이 일어났다’ 생각해서 물질(해녀 일)도 하셨다. 어머니가 구습을 좇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절망적이었다”라고 했다.
김 집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도만 하면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내가 뭔가 큰 인물이 되어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라며 “‘당신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렇게 됐습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는 환상”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객지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그래서 어머니를 많이 의지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셨다”라며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시면 시골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절대적인 두려움과 고독을 느꼈다. 그래서 아이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이 있다”라고 했다.
김 집사는 “집안일을 하고, 엄마 간호도 하고, 어떤 때는 무엇인가 팔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면서 중학생 때 총 300명인데 반에서 9등, 5등, 3등, 1등 이렇게 점점 올라 전교 1등을 했다”라며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지만, 내가 기도한 대로 성적이 올랐다”라고 했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 후에 그녀는 포항여고에 다니면서, 등교를 위해 3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등록비도 없어서 1학기가 지난 후에 부산으로 옮겨 공장에서 일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할 생각을 했다. 그녀는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며 밤 10시에 출근해서 아침 6시까지 일했다. 그녀는 밤일이 너무 버거워 1년 만에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방직공장에서 주간에 일을 했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녀는 “18살에 이것을 했다. 그것이 대단하다”라고 했다.
김 집사는 어머니를 잃고,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던 힘든 10대 시절을 보내며 신앙에서 멀어졌다. 20대 초반에는 부산에 오는 일본인을 대상으로한 관광가이드 등 여러 일을 통해 돈을 모아 초밥집을 운영했다.
돈을 꽤 모은 그녀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꿈을 꿨다. 꿈에서 주님께 항복을 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꿈에 사단을 만났는데 대적기도를 했다.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이 기도를 했으면 이것이 꿈 속에서 고스란히 재현됐다”라며 “그것이 주일이었다. 자발적으로 수영로교회로 갔다. 그리고 하루 종일 울었다. 마치 물 떠난 물고기가 다시 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라고 했다.
그녀는 초밥집을 운영하며 억울하게 단속에 걸린 일화를 소개하며 “나중에 변호사를 하면서 많은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라며 “부산시 행정심판 위원회를 하며 사장님들 중에 나처럼 순진한 약자들을 위해 많이 헤아려 드렸다”라고 했다.
김 집사는 30일 집행정지로 일을 못하는 상황에서 기도원에 가 3일을 금식하며 기도하고,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며,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많은 부조리를 경험하고 법대에 갈 것을 결심했다. 6개월을 공부해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야간으로 입학했다.
그녀는 “공부하며 장학금으로 학비가 충당됐고, 기숙사 생활로 식비가 들지 않았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다”라며 “공부를 시작해서 사법고시를 합격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라고 했다.
# 변호사 생활과 홀몸으로 된 3자녀의 엄마로
김 집사는 “수능을 공부할 때, 우리 동네의 소녀 가장 한 명에게 3만원 씩 1년을 보냈다”라며 “사법 시험을 합격한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모 구호단체에 월급을 기부했다. 그 후에 기부는 계속 이어졌다”라고 했다.
이어 “늘 부모가 없거나 돌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각별한 마음이 있다. 그 아이들 중에는 이른바 ‘소년범’이라고 하는 보호 소년들이 있다. 이들이 건강한 어른이 되게 돕기 위해 200번 정도를 변호를 위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하며 위탁보호자 역할도 했다”라며 “그리고 힘든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면 그런 사람들 만나서 엉엉 울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김 집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아이들 입양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그 전에 언니의 아이가 19개월 때쯤 형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조카를 거의 내 자식처럼 돌봤다. 아이가 똑똑하고 예쁘게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정말 행복했다. 그래서 자신감이 조금 붙었다”라며 “내 생각에 강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느껴서, 80일 된 아이를 입양했다. 그 때쯤 언니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11살 아이, 5살 조카와 80일 된 아이의 엄마가 됐다”라고 했다.
이어 ‘아이들이 아프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막내가 저체중으로 태어나 많이 약했다. 열경련을 6번이나 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고통보다 더 컸다”라며 “그때 정말 엉엉 울었다. 수시로 응급실에 갔다”라고 했다.
그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었다. 매일 응급실에서 잠잤다. 매일 아침 눈떠서 아이들을 보면 기적”이라며 “주변의 이웃들이 도와주셨다. 주변의 내 친구들이 이모고 삼촌이고, 남남으로 만났는데 친하게 지내며 도와줬다. 특별히 교회 권사님 한 분은 우리를 10년 이상 도와주셨는데 이제는 가족”이라고 했다.
이어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 아이들을 키운 일이다. 다시 돌아가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 정치입문 계기와 추진 중인 입법
김 집사는 “내 삶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여공에서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더니 정치권의 여기저기서 많은 연락이 있었다”라며 “막상 정치인의 삶이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망가고 싶었다. 왜냐면 그 당시로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좋았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나만이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이 있다. 깊이 약자들과 함께하고 그 문제를 경험하고 그 정치인들이 많이 없는 것 같았다”라며 “국회에 가서 건전한 입양문화를 만드는 것과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분들의 자립을 위한 입법과 정책활동, 그리고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보호소년들을 위해 일하는 것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이것이 진정한 소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별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싸인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강하게 요청하면 가겠다’라고 했다. 왜냐면 보통은 정치인이 ‘내가 가겠다’라고 하니까...’”라며 “기도하는 중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은 기자였다. 그 기자가 전화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고 했다.
김 집사는 ‘추진 중인 법안’에 대해 “많은 일이 있지만 입양법이 있다. 현행법상 국내외 입양이 하나로 관할하고 있다. 그 법을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라며 “두 법안 다 보건복지위를 통과하여 법사위에 가 있다. 곧 본회의를 통과하면 우리나라 입양문화가 개선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이어 “베이비박스 아이들이다. 나는 이것이 버려졌다고 표현하면 안 되고 맡겨졌다고 표현해야 한다고 본다”라며 “임신 중에 갈등을 겪는 여성이 아기를 출산하고 자기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기를 시설에 맡기며 ‘누군가에 의해 잘 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어 “임신 갈등을 겪는 여성이 위험하게 병원에 가서 ‘낙태 수술’을 할 것이 아니고, 건강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돕고, 아기가 입양을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그 법이 ‘보호 출산법’이다. ‘익명 출산’ 내지는 ‘비밀 출산’으로 불리는 법이다. 그 법의 제정안을 발의했다. 엄마의 ‘건강권’과 ‘자기 결정권’, 이 2가지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발의했는데 빨리 통과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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