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외사촌 동생의 남편이 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고등학교 교사인데, 성경과 신학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관심 정도가 아니라 전도사나 목사들이 회피할 정도로 성경에 대한 질문이 무지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어느 날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자기가 존경하는 목사에 관한 얘기를 했다. 설교 중에 ‘목회자들이 구원이나 신앙의 확신을 가지라고 성도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 했다.
구원파 이단들이 ‘구원의 확신’을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며 물어보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구원의 확신이 한 개인의 구원을 100%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다. 각자의 개인 구원의 확실성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그 모든 것들을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바로 거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체험이나 확신은 구원 확신의 절대적 근거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고후 13:5절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예수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면 스스로 믿음의 사람임을 테스트해보고 입증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 구원의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순 없다 하더라도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근거는 될 수 있음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정상이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목사는 성경 실력이 없는 문제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구원에 관해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를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일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그에 대한 개인의 신앙고백과 확신이 간접적인 수단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확신이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보니, 성경이나 신앙에 관해서 의문을 가지는 자세를 비신앙적인 눈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의심’(doubt)과 ‘의문’(question)은 개념상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심’이야말로 문제 있는 신앙의 자세가 맞지만, ‘의문’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려는 자세로 아주 올바른 자세라 말할 수 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라고 했다. 성경도 침노하는 자의 것임을 나 스스로가 지금까지 경험해왔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오면 반드시 의문을 제기하고 풀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
만일 내가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내용이 나왔을 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자주 말했듯이 ‘그냥 믿자!’ 하고 넘어갔더라면 지금처럼 성경을 많이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 17:14-20절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에 보면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병 걸린 아이를 예수님은 단번에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 그걸 보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어째서 자신들은 고치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었어도 능력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이들은 모두가 다 ‘겨자씨 한 알 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능력을 행할 수 있다’라고 강조함을 본다. 중학생 시절에 나는 그런 설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즉각 그 병을 고치셨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뭐였는가? 제자들은 ‘믿음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믿는 사람임에도 믿음이 크지 않고 작은 믿음을 소유한 이들이 많이 있다. 믿음이 작으면 기적을 행할 수 없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의 믿음이 크지 않고 작았음을 자주 지적하셨다. 오늘 이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같은 작은 믿음만 있었어도 치유가 가능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해보라. 당연히 말이 되질 않는다. 문제는 그 설교를 듣고도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문을 가진 나는 신학교에 들어가 성경해석학과 성경원어에 관한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면서 겨우 본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체리 힐(Cherie Hill)은 자신의 저서 『내게 기대렴』(규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많은 믿음이 필요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문제에 비례할 필요는 없다. 산을 옮기려면 그 산만 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아니며’, 예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이 ‘많은 믿음이 필요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고? 천만에다. 본문은 분명히 ‘믿음이 작은 까닭에 너희는 병을 고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겨자씨가 작다 보니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으로 잘못 번역했고, 또한 잘못 이해를 해온 것이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as’ (like) a mustard seed)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비유로 활용하신 이유가 뭘까?
비록 겨자씨가 작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키보다 더 크게 자랄 정도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과 ‘질적으로 우수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씨를 활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양질’에다가 ‘큰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추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의문을 갖지 않았다면 이런 올바른 해석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날마다 영의 양식인 성경을 읽어야 하고,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오면 언제나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께 묻고 전문가에게 알아보고 개인적으로 연구하면서 푸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따지고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읽어보라. 언제나 생명의 말씀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남들이 맛보지 못한 성경의 진미를 마음껏 맛보고 누릴 수 있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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