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 대표 론 워드)가 1년 전 한국UBF의 대표인 김학모 목사가 한국 기독교방송 C채널(대표 천영호)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간증한 영상을 최근 유튜브 채널에 게시했다.
이 영상은 김학모(모세) 목사가 C채널의 ‘힐링토크 회복 플러스’에 출연한 영상으로, 김 목사는 UBF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자신의 삶의 이야기, 부르심 그리고 UBF의 사역에 대해 간증을 나눴다. 이 간증의 제목은 ‘오직 주께 순종하여’이다.
UBF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사라 배리(Sarah Barry, 한국명 배사라) 선교사와 故 이창호(사무엘) 목사가 1961년 창립했다. 이 두 사역자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방황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성경공부 선교단체’를 시작했다. UBF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이른 70년대부터 해외선교를 시작해 미국과 유럽, 80년대부터는 캐나다, 멕시코, 소련 등을 위해 선교했고,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유학생 선교가 활발했다.
김 목사는 UBF의 자립선교에 대해 말하며, 창립자인 이창호 목사가 했던 얘기를 언급했다. 이 목사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중략)....더하시리라’는 말씀을 선교현장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며, 김 목사는 “UBF에서 (해외)선교는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에 “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을 싫어했다”며, 기독교인들을 무시했고 전도하는 기독교인을 보면 “재수 없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김학모 목사는 74년 한국외대에 입학했지만, 폐결핵으로 인해 휴학하고 한 달 후에는 유신으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졌다. ‘유신반대운동’에 참여했기에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쓰고 처음에는 무기정학에서 나중에는 재적으로 이어졌다.
폐결핵이 있었기에 군대에서 신체검사에서 통과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3번이나 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3차례의 신체검사를 받았다. 김 목사는 이에 대해 “나라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생각(확실하지는 않지만)”했다.
3차례 검사 중 나중 2차례 신체검사에서 김 목사를 검사한 군의관은 약한 건강에 군입대를 해야하는 것에 괴로워 하던 김 목사를 잘 격려하고 위로해줬다(두 번 다 김 목사를 ‘병종 판정’으로 다시 사회로 돌려보냈다). 그래서 김 목사는 그를 친절하다고 인상깊게 기억했다. 그런데 김 목사가 87년도에 독일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간증할 당시 UBF의 대표로 섬기던 목사가 그 간증을 듣고 본인이 바로 그 군의관이었음을 밝혔다고 한다.
김 목사는 이에 대해 “나는 그때 예수님도 몰랐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분을 그곳에 보내셨다. 그분은 2대 대표셨고, 나는 6대 대표가 됐다”며 “인생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10.26 사태 이후 대학으로 복학한 김 목사는 “인생의 문제가 ‘허무의 문제’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으며, 밥 먹다가 마음이 허무해서 숟가락을 놓을 정도로 힘들어서 대학교 때는 허무의 문제를 고찰해 보고 교양을 쌓고자 대학시절에 총 1,000권의 책을 읽는 것을 목표로 했다.
김 목사는 5.18로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 집에 있던 중에 후배가 줬던 책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를 읽다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그때부터 새벽예배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80년 ‘여의도세계복음화 대성회’를 금식기도로 준비했고, 그 성회에서 빌 브라이트 박사(Bill Bright, CCC 창립자)의 영접초청기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다. 김 목사는 그곳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설교 중에 말씀하셨던 ‘캠퍼스는 전도의 황금어장입니다’라는 말씀만 머릿 속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그후 허무를 탐색하기 위해 세운 목표였던 ‘대학교에서 1,000권 읽기’는 인생에서 사라졌고, 한국외대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UBF의 사역자를 만나 UBF ‘경희문센터’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대학교 때 UBF를 3번이나 떠나려 했다. 공동체 생활에 매이고 싶지 않고, 대학의 낭만을 찾아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UBF를 3번이나 떠나려 할 때마다 허리통증이 심했고 ‘UBF를 나와서 그런가’ 고민했지만 버텼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UBF로 돌아가 간사님과 기도하고 사무실에서 나올 때면 신기하게 허리통증이 나았다. 사무실로 들어갈 때는 아파서 다리를 질질 끌고 들어갔는데, 기도를 하고 나올 때면 신기하게 회복됐다.
김 목사는 그렇게 UBF에 ‘들어오고 나가기’를 3번 반복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3번 연거푸 겪고 “처음에는 좀 슬펐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3번째는 생각을 좀 달리했다. ‘UBF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곳이 분명하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었도 UBF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어느 겨울 로마서를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한국외대 대학원에 UBF를 개척하라’라는 말씀이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며 “엎드려서 되게 두려워 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개척하기를 주저하던 중에 UBF의 ‘바이블아카데미’에서 사람들에게 창세기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17장에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를 묵상하던 중 이 말씀이 강력하게 와닿아 캠퍼스 개척에 대한 확신으로 받았다.
그렇지만 김 목사는 바로 개척을 하기 보다는 ‘3년 동안 한국외대에서 밤마다 기도하는 것’으로 서원했다. 12월에 비가 내리는 밤에 기도하고 돌아오며 운동장을 지나가던 중 갑자기 손이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마치 손에 세계지도가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확연한 느낌에 내가 놀랐다. 내가 만약 내 손으로 어느 곳을 ‘탕’치면 그 곳에 세계지도가 새겨질 것 같은 느낌이다”며 “몇 년 동안 이 느낌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것과 세계지도가 맞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3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김 목사는 유신반대운동에 참여해 대학에서 재적되고 정권이 바뀌어서 80년에 복학할 수 있기까지에 대해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그 사건이 다시 해석됐다. 그 힘든 시기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했던 것들이 나중에 사역할 때, 가르치고 메시지를 던질 때 거기서 엄청난 이념과 사상이 나왔다. 그 섭리가 이해됐다”며 “그 때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의 보물창고이다. 그 사건에서 꺼내 쓰는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요즘 대학 사역의 흐름’에 대한 MC의 질문에, 김 목사는 2000년대 전과 후를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로 지칭하며, 아날로그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학생들이 시간적 여유도 있고,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에 가르쳐주면 잘 따라 왔다”고 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 아이들은 “디저털 환경에 정보들이 많다. 굳이 누구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세대로, 더 이상 누구의 지시를 받는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 학생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초점이 맞춰있다라면 디지털 세대들은 ‘무엇이 재미있는가?’에 관심에 많다”고 했다.
‘UBF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에, 김 목사는 “지난 60년을 열심히 달려왔다. 다음 60년을 위해 새롭게 정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그는 “이 세대를 연구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할 수 있겠지만 효과적인 것이 나오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성경을 더 깊게 연구할 것과 교육에 대해 강조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깊게 덧입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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