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글
원주 지방에 개신교 선교 초기 처음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다만 원주 지방 초기 선교역사는 몇 분 교회사 학자가 쓴 ‘초기교회 형성사’와 원주, 여주, 충주, 제천 지역의 오래된 교회를 중심으로 발간된 개교회사를 통해 정리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주 지방 선교 초기 자료를 소개해 보자면, 그 첫 책은 『A Modern Pioneer In Korea』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쓴 아펜젤러의 전기이다. 이 책을 이만열 교수가 번역해 아펜젤러의 보고서, 일기 등과 함께 1985년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 『아펜젤러』로 펴냈다. 이 책에 언제 원주 지방에 선교사들이 방문했는가 하는 기술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과 교회역사가들이 인용해 소개한 자료는 아펜젤러에 관한 책 발간 20년이 지난 2005년, 이덕주 교수가 “원주제일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원주제일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강연 발표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세 분이 소개한 원주 지방을 처음 방문한 선교사들에 관한 기술 중 몇몇 부분은 잘못되어있다. 이 잘못된 자료들이 고착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어 여기에서 몇 가지 오류를 바로잡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1. 1889년 8월 19일(월요일)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존스(G. H. Jones) 선교사가 처음 원주를 방문했다.
1-1. 원주를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앞에 머리글에서 소개한 3명의 자료에는 아펜젤러와 존스가 원주 지방을 방문한 기간을 1888년 8월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순행 중 원주를 방문한 날짜는 토요일이고, 다음날 순행선교사 2명이 강원감영(江原監營) 객사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그리피스, 이만열, 이덕주 모두 이같이 기술했는데, 이 부분은 세 사람 모두 오류이다.
아펜젤러와 존스 두 선교사가 남긴 1889년 남부순행일기를 보면 분명 그들이 원주 지방을 방문한 날짜는 1889년 8월 19일 월요일이었으며, 그들이 강원도 원주로 오며 주일예배를 드린 곳은 8월 18일 주일 경기도 지평(砥平)이었다.
1-2. 처음 원주를 방문한 선교사들의 순행 경로
조성환은 그가 집필한 『헨리 G. 아펜젤러 문서』에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순행 코스에 충청도 공주를 경유해 원주에 도착했다고 기술했다.
김석영은 그의 책 『처음선교사 아펜젤러』에 이만열의 책 『아펜젤러』 내용을 인용해 원주 여행 코스에는 없었던 충청도 ‘내포’를 경유해 원주로 갔다고 기술했다.
또한 한국감리교회역사학회 창립 회장을 역임했고 동부연회 초대 감독으로 사역한 윤춘병은 『여주중앙교회 100년사』에 “아펜젤러 목사는 1889년 3월 존스 선교사와 동행하여 충청도 동쪽(이천, 여주)을 지나 원주, 제천, 안동을 거쳐 부산까지 순회 전도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다”고 기술했다.
위에서 조성환이 기술한 아펜젤러의 공주 여행은 남부순행과는 관계가 없는 1889년 2월의 순행으로, 아펜젤러와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공주를 다녀온 것이다. 또한 김석영이 기술한 두 분 선교사가 남부순행에 충청도 내포를 경유해 원주로 갔다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윤춘병의 “충청도 동쪽(이천, 여주)을 지나...”라는 기술은 한국에는 와 본 적도 없이 처음 아펜젤러의 전기를 펴낸 그리피스의 서술을 여과 없이 인용한 오류이다.
원주 지방을 1889년 8월 19일 처음 방문한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의 원주까지 경로는 조선시대 고속도로 성격을 띤 평해대로 노선으로, 서울→양평→지평→고송→양동→솔치고개→안창→원주로 기술되어야 한다.
Ⅱ. 원주 지방에 선교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선교역사, 교회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 중 어떤 이들은 ‘현재 한국 교단의 주류로 성장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 중 어느 교단 선교사가 먼저 조선 땅에 첫 발을 디딘 분인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교단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위해 처음 도착한 분이라는 여러 이유를 대며 강조하고, 자신이 속한 교단이 한국 선교의 ‘장자 교단’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저에는 우리 사회에 편만한 우월주의, 권위주의, 일등주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대 교단을 대표하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올림픽 경기처럼 ‘처음’ 경쟁을 하기 위해 온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같은 날 같은 배로 조선에 들어와 협력하며 한국 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즉, 함께 협력하는 ‘에큐메니컬’ 선교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성서번역, 목회, 교회설립, 선교여행, 선교정책 등에서 그들이 도착해 함께 추구한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었다.
원주 도성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들이 다녀간 지 이미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원주선교 관련 초기 사진 자료를 발굴·정리해 화보집으로 펴내 기록하고, 초기 선교역사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했을 때 그는 그의 사역이 계속 이어질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원주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사람들은 누구일까?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생각하며 원주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첫 사람들부터 이를 가꾼 사람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2-1. 원주 지방 첫 선교 관리자, 노블(W. A. Noble) 선교사 <1901년>
1901년 연회에서 미감리회는 지방(District)을 나눠 북지방에는 노블, 서지방에는 존스, 남지방에는 스크랜턴에게 지역 선교를 책임지게 하였다. 본격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에 걸쳐 선교하려는 목적이었다. 1909년 원주 지역은 다시 미국 북감리회 선교 구역으로 변경되었다.
비록 노블 선교사가 원주 지방을 방문한 것은 그가 북지방 선교 관리자로 임명된 이후 1911년이었지만, 노블 선교사는 원주 지방 선교를 관리한 첫 선교사로 기록된다.
2-2. 원주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전도인, 장춘명 <1901~1902년>
지금까지 알려진 원주 도성에 1905년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무아각’ 무스(Moose) 선교사, ‘고영복’ 콜리어(C. T. Collyer) 선교사, 그리고 이들을 안내하여 원주에 들어와 전도한 ‘조선인 교역자’ 장의원 전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원주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사람은 누구일까? 1902년 5월호 〈신학월보〉에 보면 “장춘명의 전도 구역은 이천과 광주, 여주, 장호원, 죽산, 음죽, 용인, 양지, 충주, 진천, 제천 등 경기도와 충북 경계를 넘어 ‘원주’까지 확대되었다”1)라는 보고 내용이 있다. 이 기사에서 장춘명이 정확하게 언제 원주를 방문했는지 그 일자는 알 수 없지만, 이 보고가 이뤄진 것은 1902년 3월 11일에 이천계삭회가 이천읍교회에서 열릴 때이므로 원주 땅에 첫 복음이 전해진 때는 1901년에서 1902년 3월 이전으로 볼 수 있다.
1902년 이천교회에 담임으로 파송받은 미감리회 전도사 문경호는 1903년 봄, 장춘명과 함께 이천지방을 순회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서 초기 원주의 선교 상황을 알 수 있다. 문경호와 장춘명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이천과 원주 두 지방을 돌아보았다. 먼저 이천지방 여덟 고을 38개 교회를 둘러보고 여주를 거쳐 원주로 들어갔다.2)
또한 여주 동편의 선교적 역동성에 대하여 1905년 미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서 스웨어러 선교사는 이러한 보고를 했다.
“여주구역은 작년에 여주구역과 음죽구역으로 분할되었다. 또한 이전에 이 구역에 소속되어 있던 다섯 개의 공동체를 남감리회 무스 형제에게 최근 양도했다.”3)
이러한 자료를 근거해 보자면, 원주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매서인 장춘명이고 초기 복음의 전파는 여주강 동편인 원주 부론 땅 근처부터 현 문막 지역까지 장춘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2-3. 원주 지방에 처음 복음을 전한 선교사, 아서 웰본(Arthur G. Welbon) 선교사 <1904년>
북장로회 선교부 아서 웰본(오월본) 선교사는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원주 지방을 순회하기 몇 달 전 1904년 11월 23일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양근, 곡수를 거쳐 12월 1일 원주에 도착했다. 아서 웰본의 일기를 보자.
“1904년 12월 1일 아서-
5시쯤 일어나서 7시에 출발했다. 샛길로 오느라 몇 사람밖에 못 보았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아침나절에 40리를 왔다. 마을4)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길을 잃어버려서 날이 저문 뒤에야 원주읍에 이르렀다. 여관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이제껏 잔 방 중에서 제일 작은 방에 들었다.”5)
아서 웰본은 다음날 기도회를 마치고 원주 읍내 거리로 나가 책(쪽 복음)과 달력을 팔았으며, 계속해서 횡성, 홍천을 거쳐 12월 5일에는 춘천으로 전도여행을 계속했고, 금성읍(현 김화군)을 거쳐 12월 16일 서울 집에 도착했다.
2년 후 아서 웰본은 1906년 2월에도 원주를 찾았다. 2월 15일 서울을 출발해 양근(현 양평), 풍수원을 거쳐 원주에는 2월 20일 정오 전에 도착해 많은 책을 팔기도 하고, 원주에 오기 전 지나는 마을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진행했다. 아서 웰본은 1902년부터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를 독립구역으로 삼아 관리했다. 이후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아서 웰본은 1909년 봄 클라크(C. A. Clark, 곽안련)와 함께 원주에 들어와 “원주읍 동쪽 변두리, 언덕 가장자리에 위치한 선교부지 20에이커를”6) 확보하였고, 그해 9월에는 교계예양 협정에 의해 북감리교회에 원주선교부를 넘겨주고 안동선교부를 개척한 선교사이다.
2-4. 원주 지방에 교회를 설립한 첫 본토인, 이계삼(李桂三) 권사 <1905년>
이계삼 권사는 조선시대 말기 1885년(고종22년)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 초 홀어머니를 모시며 청년 시절 흥원창에서 일을 하며 종잣돈을 모은 이계삼은 부론면 흥호리 김귀제(金龜濟)와 혼인한 누이 이 씨(李氏)와, 농사를 지으며 흥원창에서 살겠다는 동생 이회원(李回源)을 남겨두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후 홀어머니를 모시고 그 당시 경제 활동이 더 활발했던 건등면(현, 원주시 문막읍) 문막리 240번지(당시 장터 인근)로 이주해 정착했다.
1905년 봄 이계삼은 함경도에서 영접한 예수님을 모시기로 하고, 문막 장터에 있는 그의 집에서 모친과 몇몇 믿는 이와 함께 집에 마련한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원주 지방에 교회를 설립한 첫 본토인은 문막교회를 창립한 이계삼 권사이다.
2-5. 원주 지방에서 처음 열린 여성사경회 주최자, 왐볼드(Wambold) 선교사 <1908년>
왐볼드 선교사는 1866년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북장로회 선교사로 1896년 5월 내한하여 이임할 때까지 정신여학교에서 봉사하였다. 1908년 원주 지방이 북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이관되었을 때, 10월 21일 원주에 도착하여 5일간 여성 사경회를 인도했다.
1908년 『the Korea Mission Field』 12월 호에 기고한 왐볼드의 선교사역 보고 ‘33일간의 지방 사경회’를 통해, 당시 대부분의 교회에 전임 ‘본처전도사’도 없던 시절 어떻게 선교활동을 했는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왐볼드의 이 보고서는 1908년 이전 원주 지방에 있던 원주교회, 문막교회, 횡성교회,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잘개미교회’7)의 초기 원주 지방 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1911년 6월 원주 지방회가 결성된 이후 열린 첫 사경회는 그 이듬해 1월에 열린 것으로 보인다.
“원주 지방 사경회가 1912년 1월 29일부터 2월 7일까지 10일 동안 원주읍에서 60여 명이 모여 특별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갑·을 반으로 나누어 마태복음, 전도법, 구약총론, 창세기, 신약총론, 마가복음, 고린도전서, 규측대강 등을 공부하였는데 교사로는 박원백(감리사), 권신일(원주구역), 이동기(평창구역), 김종식(횡성구역)이 수고하였다.”8)
2-6. 원주선교부 첫 부지 매입 마무리 <1909년>
1908년 왐볼드 선교사가 보고한 사경회 보고서에는 “원주에 도착했을 때 내가 클라크(곽안련) 선교사한테 받은 편지에는,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기지 않도록 선교사 주택을 위해 사놓은 새로운 땅 부근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그쪽을 봤을 때, 거기는 높지 않은 산등성이가 보였고, 1894년도 서울의 연못골과 비슷했다”9)라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1908년에는 부지 매입 계약이 완결된 것이 아니고 부지 매입대금을 전하지 않은 가계약 상태로 보인다.
1937년 1월 1일 〈감리회보〉 3면 기사를 보자. “1907년에는 장감(長監) 양 교파에서 전도구역을 정할 때에 본 교회는 장로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때 장로파 선교사 곽안련(郭安蓮), 오월번 양씨와 조사 김영옥(金永玉), 영수 엄응삼(嚴應三) 제씨의 주선으로 토지 2만여 평을 사서 선교회 용지로 충당하다. 이때 신자는 15인이었다.”
원주지부 선교관리자 아서 웰본 선교사의 부인 새디의 1909년 3월 1일 자 일기에는 “언더우드 박사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편지를 보내셨다. 박사님은 그곳에 사는 여성 한 분이 원주 병원을 위해 $5,000 모금을 약조했다고 하셨다”10)라고 기록했다.
계속해서 3월 12일 자 일기에는 “갬블 씨로부터 원주지부 부지를 위해 $300을 이사회로 송금했다는 편지가 왔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기금을 가지고 웰본은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와 ‘20에이커’(2만여 평)의 땅을 북장로회 원주 선교부지로 매입 절차를 마쳤다. 이 선교부지는 남감리회에서 서원촌에 마련한 4간 반 초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우 넓은 규모였다. 사실 웰본은 원주에 강력한 선교부를 개설하여 예배당은 물론, 학교와 병원까지 설립하여 원주를 강원도와 충북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련한 북장로회 원주 선교부지는 1909년 체결된 양 교단의 선교지 분할 협상 결정에 따라 웰본은 원주를 미감리회 선교회에 넘기고 경북 안동 선교부로 옮겨 갔다. 미감리회 선교회는 미북장로회에서 마련한 2만여 평의 선교부지를 2,400엔(1,200달러)을 주고 인수하였다.11) 이로써 원주는 2년 만에 다시 감리교 선교구역이 되었다.
2-7. 원주 지방 첫 파송 목사와 전도사, 권신일 목사 <1909년> 전밀라 전도사, 박분조 원주여선교부 직원<1935년>
1909년 9월 원주 지방이 북감리회로 변경될 때 첫 목회자로 권신일 목사와 박현일, 김종식 전도사가 파송되었다. 파송받은 목회자들은 모두 인천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원주 지방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데밍(Charles S. Deming, 都伊明) 선교사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데밍 선교사는 1909년 9월 원주 지방 선교관리자였는데 서울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여러 지방에 개척된 감리교회 선교관리자로 일했다.
이후 원주선교부에 파송된 최초의 여 전도사는 전밀라(全密羅)로, 1935년 원주 지방 순회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밀라 전도사는 제천에서 출생해 충주보통학교를 마치고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 한국 여성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편, 같은 해에 원주선교부에는 여선교사들의 통역과 행정을 전담하는 박분조가 파송되었는데, 박분조(朴蕡祚)는 강릉 지방에서 최초로 대학을 졸업하고 원주선교부에 파송된 직원이었다. <계속>
[미주]
1) 〈신학월보〉 1902년 5월, 147~148쪽.
2) 문경호, “교회가 왕성함”, 〈신학월보〉, 1903.5, 194쪽.
3) W. C. Swearer, “South Korea District”, (1905)
4) 나룻배로 강을 건너 40리를 걸은 후 점심을 먹은 마을은 문막으로 추정된다.
5) 프리슬라 웰본 에비, 번역 강현희, 김현수, 『서울장로교 선교사들의 일상』, 에스더 재단, 2017, 141p.
6) Minutes and Report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to the Annual Meeting, 1909, 71p.
7) 현 원주시 흥업면 흥업리 잘개미(자감촌). 한라대학교 앞마을
8) 〈그리스도신문〉 1912년 2월 29일 자, 2면.
9) 정원화·리진만, 『문막교회 117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 문막교회, 367p.
10) 프리실라 웰본 에비, 『한국 선교사역의 확장기』, 에스더재단, 154p.
11) Annual Report of Foreign Mission Board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1, 204p.
※리진만 선교사는 우간다와 인도네시아 선교를 마치고 현재는 초기선교역사 자료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리 선교사는 아펜젤러와 존스가 1889년 8월 처음으로 내륙 지방을 순행한 후 작성한 두 분의 일기를 발굴해 최초로 번역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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