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서 일평생을 살다 보면 온갖 풍상(風霜)을 겪는다. 나이가 스무 살이 되면 큰 근심, 작은 근심, 좋은 근심, 나쁜 근심 속에 살아가게 된다. 좋은 일보다는 걱정 근심이 더 많기 쉬운데, 세상이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심성이 메말라 가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면 그 힘듦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힘듦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본다. 어떻게든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 속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 부류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넘어서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얼마나 삶이 힘들면 세상을 등지겠는가.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우리 인생은 유한한 생애를 살다가 한번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있다. 필자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자녀들을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이다. 자녀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그릇된 행위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하나님은 육의 부모에게 자녀들을 소유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자녀들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 동안 잠시 맡겨 주신 이들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교회에서도 생명 존중 사상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독으로 인하여 죽음의 문턱까지는 가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지는 않는다는 글귀가 있다.
자기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은 결국 어려움과 고독이 하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사람은 용서받을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설교 말씀이 생각난다.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있어도 삶의 의지만 있다면 못 이겨 낼 것이 없다. 끝으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을 우리 스스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극복하며 살았으면 한다.
부산소망교회 이성심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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