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년 전, 부천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다. 예배 시작 두 시간 전쯤 도착해서 담임 목사님 부부와 식사를 했다. 남편 목사님은 내성적인 분으로 조용히 식사만 했는데, 사모님이 활달하고 화통한 분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 사모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교수님, 교회에서 강사로 매년 여러 설교자들을 모셔보는데 설교 잘하는 분이 참 드문 것 같아요.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최고의 설교인지 궁금해요?”
[2] 강사로 부른 사람 앞에서 언급할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런 진솔한 대화에는 즐겨 응하는 편인지라 친절하게 답을 했다. 사모님이 내게 던진 질문을 모두에게 한 번 되물어보자.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최고의 설교인가?’
이 질문에 보수교단의 설교학 교수나 설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최고의 설교이다.’라고 말이다.
[3] 이 답변에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에 합당한 논리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에 따르는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 대답에 반박할 자신도 의지도 없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최고의 설교’라고 하는데 별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본문’이 어떤 의미냐는 점이다. 모두가 ‘본문’ ‘본문’ 하는데, 도대체 ‘본문’이 가리키는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 뜻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대부분의 설교 전문가들이나 설교자들이 말하는 ‘본문’은 성경 본문의 ‘콘텐츠’(내용, content)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본문 저자의 정확한 의도와 의미’ 말이다. 하지만 이는 ‘본문’이란 말 속에 포함된 의미 중 1/3 밖에 안 되는 내용임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첫째, ‘본문’이 의미하는 요소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본문 저자가 의도한 '콘텐츠'가 맞다. 하지만 그것이 본문이 가리키는 모든 의미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5] 둘째는 그 본문의 콘텐츠가 어떤 장르(Genre)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에 다양한 장르가 있다. 소중한 성경 저자의 내용들이 각기 다른 내러티브, 잠언, 시, 예언, 서신 등의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본문의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양식으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단 말이다.
이것을 설교로 표현하자면 ‘설교의 형태’(form)이다.
[6] 현재 설교자 대다수가 설교할 때마다 전개하고 있는 ‘삼대지의 획일화 된(uniformed) 설교의 형태’ 하나만 가지고 본문 저자의 소중한 콘텐츠를 늘 전달하려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66권 개별 성경 본문의 콘텐츠를 가장 정확하고도 쉽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는 ‘설교의 프레임’이란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 또한 ‘본문에 충실한’ 설교로 만드는 의미 중 하나임을 놓치지 말자.
물론 절대 제외돼서는 안 될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7] 셋째는 성경 본문의 콘텐츠를 가장 효과적인 설교 형태나 프레임에 담아 전달할 때 ‘다양한 문체나 문학양식’이 그 내용 속에 발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평소 즐겨 사용하신 ‘직유법, 은유법, 과장법, 강조법, 샌드위치 기법, 평행법’ 등등이 그분의 설교 속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음을 놓쳐선 안 된다.
이것을 설교 작성법으로 표현하자면 감칠맛 나고 맛깔스런 ‘수사기법’(rhetoric)이라 할 수 있다.
[8] 이처럼 ‘본문에 충실하다’ 함은 ‘본문의 콘텐츠’만이 아니라 ‘다양한 설교의 형태나 프레임’, 그리고 ‘감칠맛 나는 수사기법’까지 다 포함하는 의미라는 사실을 놓쳐선 안된다. 그렇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만 소홀히 되어도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라.
성경 본문을 중요시하는 보수 교단 설교자들의 설교가 청중에게 잘 들리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본문 저자의 의미에만 모든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9] 사람들이 강해설교를 ‘따분하고 지겨운 설교’로 오해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본문의 콘텐츠에만 신경 쓸 뿐 나머지 두 요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강해설교가 아니다. ‘강해설교’란 이 세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잘 발휘하여 ‘가장 성경적인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청중에게 잘 전달하는 설교’를 말한다.
본문 저자의 의미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이 청중들에게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고 감동적으로 잘 전달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 정리해보자.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최고의 설교’라면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문 저자의 의미인 ‘콘텐츠’와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는 도구인 드라마틱한 ‘설교의 형태나 프레임’과 기막힌 ‘수사기법’ 모두에 충실한 설교”를 가리킨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본문 저자의 콘텐츠에 충실한 설교’로만 오해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11] 위의 세 가지 귀중한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최고의 설교자들을 많이 많이 목도하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오늘 당신이 바로 그 ‘최고의 설교자’란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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