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켜 1분간이나 세계를 숨죽이게 했던 연출가 이어령 전 문체부 장관이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자 우리 모두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이어령 교수. 22살에 문단에 데뷔해서 하늘같은 원로들의 권위의식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유명 인사가 된 천재적인 인물이다.
‘창조’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거물.
[2] 수없이 많은 저서들 중 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신앙 회심에 관해 쓴 첫 책이 『지성에서 영성으로』(열림원, 2017)이다. 그간 굳게 닫아왔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은 그의 딸 고 이민아 목사였다. 자식 앞에 강한 부모는 없다. 그의 책 표지에 있는 띠지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3] 그랬다. 자식의 질병과 오랜 기도 앞에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최고 지성 이어령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령이 젊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전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화제였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신앙의 신비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걸 세상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과도 흡사하고 다윗의 <시편>과도 닮았다.
[4] 생전에 부친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다고 눈시울을 적셨던 딸 이민아 목사는 이 장관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작년에 출간된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 2021)는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집필한 아버지 이어령 장관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책 표지엔 “세상의 모든 딸들과 딸을 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편지글”이라 소개되어 있다.
[5] 서문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네가 떠난 지 어언 십년이 되어가는구나. 지금 너의 눈물 자국마다 꽃들이 피어나고 너의 울음소리마다 꽃을 노래하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눈물로 품어주었던 땅 끝의 아이들은 지금 어른이 되어 다른 아이들을 품어주고, 네가 학생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들은 지금 다른 마당에서 이어져가고 있다. 죽음이 허무요 끝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보여주었다. 그래. 이제 마음 놓고 울어도 된다. 오래 못 본 내 딸아!”
[6] 받아 적다가 미국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와락 눈물샘 터지게 만든 가슴 아픈 글이지만, 한편으론 찬란한 아침을 약속하는 ‘소망의 굿나잇 키스’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8일부터 12월 8일까지 총 8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이재철 목사의 대담을 관심 갖고 들어본 적이 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 여러 분야에 대해서 박식한 학자이긴 하지만 성경적 지식과 사고가 얕고 빈약한 아쉬움이 엿보였다.
[7] 이후로 신앙의 세계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더 깊은 지식과 세계관이 쌓였으리라 짐작하긴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학자의 기우이다.
최근 그가 집필한 책들과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인터뷰들을 추적해보았다.
삶을 한발 한발 디뎌가면서 신의 존재를 느낀다고 했고, 최초의 빅뱅은 천지창조였다고 말한다. 과학을 잘 모르면 무신론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알면 신의 질서를 만난다고도 했다.
[8] 자기 몸의 지문도 마음의 지문도 세상에 하나뿐인데, 그걸 하나님의 유일한 도장으로 표현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마음의 지문에는 신의 지문이 남아있다고도 했다. 자기 집도 자기 자녀도 자기 책도 자기 지성도 분명히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다 하나님이 선물이었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딸이 그 어렵다는 법대를 조기 졸업하고 외롭게 애 키울 때, 그날 그 바닷가에서처럼 “아버지!”하고 목이 쉬도록 울 때, 자신의 대역을 해준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달았다.
[9] 자신이 못해준 걸 하나님이 대신 해주셨으니 이젠 그걸 갚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이혼하고도 편지 한 장 안 쓰던 쿨한 딸이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면 뭘 못 믿겠냐 해서 신앙의 여로를 시작했다고 한다. 딸이 실명의 위기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눈도 함께 밝아짐을 깨달았다고 한다. 딸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딸의 뒤를 좇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부끄러움보다는 딸에 대해 대견스러워하는 아비의 흐뭇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0]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마지막에 ‘END’ 마크 대신 ‘꽃봉오리를 하나’ 꽂아놓을 거라고 했다. 피어있는 꽃은 시들지만, 꽃봉오리라면 영화의 시작처럼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주옥같이 많은 말과 글들을 남긴 채 이제 이어령 전 장관도 사연 많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사랑하는 딸 이민아 목사와 재회했으리라 확신한다.
[11] 자신이 영화감독이라면 ‘END’ 대신 ‘꽃봉오리 하나’를 엔딩 장면에 남길 거라던 그의 한 마디는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로 완전히 들어섰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끝없이 지속되는 영원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신앙고백을 남긴 채 그분은 자기 본향으로 우리 앞서 떠났다. 그렇다.
‘죽음과 별세는 영원 세계로 이어지는 축제의 시작이다.’
[12] 아, 어찌 놓치랴! 이 시대 최고 지성과 영성인 이어령 성도의 신앙고백을. ‘END’가 아닌 ‘AND.’ 우리 또한 그분처럼 그날을 바라보며 멋지게 살다 떠나가자!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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