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패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맹인이었고 성인으로서 그녀가 본 유일한 빛은 하나님의 빛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를 떠 바쳐왔다. 1905년 3월 24일에, 그녀는 85세가 되었고, 뉴욕의 교회들은 그 날을 패니 크로스비의 날로 할 것을 결정했다. 3월 26일 주일에 미국 전역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녀의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교회마다 가득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음악이 교회의 문을 통해 거리로 울려 퍼졌으며 교회로 들어오지 못한 많은 영혼들을 은혜로 감동시켰다. 모든 교회에서 그녀를 존경하며 기부금이 모아졌고, 수 천 달러의 사랑의 선물이 뉴욕의 그녀에게로 보내졌다. 이번에는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 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패니는 그 돈의 일부를 자신을 보살피는 여동생들에게 주었고 대부분은 선교시설과 복지시설에 다 기부했다.

1905년에 그녀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80년의 기억들’이었다. 1906년에 그 책은 인쇄되었지만 행복과 함께 비극이 왔다. 자신을 돌보던 캐리는 암으로 죽었고, 몇 달 후 주님은 줄리의 딸인 이다를 데리고 가셨다. 패니는 계속 자신에게 말했다.

“결코 포기하지 마라, 결코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그녀의 나이 비록 86세이었지만, 이후에도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1년에 약 50편의 찬송가를 계속 썼다.

패니는 여생을 브리지포트의 웰 거리에 사는 친구들인 헨리와 플로렌스 부스와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선교여행을 했고 거리의 선교 시설에서 일했으며 1914년, 다시 심장마비로 고통 받을 때까지 그 사역을 꾸준히 계속했다. 의사가 그녀에게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오히려 기쁨으로 그 소식을 환영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인 하워드 돈도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60년 이상을 동역했다. 그들은 다시 이 땅에서 찬송가를 만들 수 없겠지만, 패니는 주님이 더 좋은 곳에서 그들의 재능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줄리에게 자신의 묘지나 비싼 묘석을 절대로 사지 말고 그 돈을 브리지포트 기독교 단체에 모두 기부하도록 했다. 만일 나중에 그녀의 친구들이 자신을 추모해서 돈을 모은다면, 기금을 모아 기독교 병원을 짓거나 노인들을 위한 집을 구하도록 부탁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죽을 때, 돈이나 그 무엇이든지 나를 위해 절대 쓰지 말고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유언장을 만들었고, 약간의 남은 재산은 줄리와 자신을 12년간 돌봐준 플로렌스 부스에게 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결국 그녀의 유언대로 보통의 묘비만을 만드는데 아주 약간의 돈만 지불되었을 뿐이었다.

패니 크로스비
최근 필자가 방문한 패니 크로스비의 작은 묘로 그동안 많이 훼손되어 최근 묘를 새롭게 만들었다. ©가진수 교수 제공

그녀가 죽기 전 패니는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말했다. 그 건물은 제비꽃과 사람들로 가득 찼다. 패니가 힘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시련과 슬픔이 닥쳤을 때 기도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모두 가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당신의 기도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나를 위해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나는 아직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지체하는 동안
그 전에 우리는 여행의 끝에 도착하고,
우리가 조금 일하는 동안
그 전에 저녁 그림자는 내려앉네.
우리는 잠을 자기 위해 눕고
그러나 밤은 곧 끝이 나니,
밝게, 영원히 밝게
우리는 결코 더 이상 잠을 자지 않을 것이라네.

강 너머 강둑에서
우리는 다만 섬기는 사람으로 만날 것이며,
밝게, 영원히 밝게,
여름이면 노래의 나라.

오, 영원한 삶의 축복!
오, 오랜 시간 끝없는 안식
기쁨의 황금 들판에서
축복의 지역에서!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를 보아라.
그의 왕관 앞에 조아려
그의 은혜로운 환영의 말을 들어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감미로운,

강 너머 강둑에서
우리는 다만 섬기는 사람으로 만날 것이며,
밝게, 영원히 밝게,
여름이면 노래의 나라.

평생 동안, 패니 크로스비는 그 누가 셀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시와 찬송가를 썼다. 비글로 & 메인 출판사와 일한 47년 동안 그녀는 비록 약 2,000편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6,000편의 찬송가를 썼다. 이것은 종종 그녀가 같은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썼지만, 작곡가들이 단지 한 편만 골랐기 때문이었다.

패니 크로스비
패니의 찬송을 사랑한 이들이 헌금해 만든 패니의 새로운 묘 ©가진수 교수 제공

아이라 생키, 조지 스티븐스, 그리고 존 스웨니와 일하면서 그녀는 적어도 4,000편 이상을 더 썼다. 그녀는 또한 다른 사람들과도 작업을 했기 때문에, 평생 동안 12,000 편의 찬송가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계산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그녀가 서정시, 오페레타 등을 썼고 100개 이상의 필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시가 음악과 맞춰지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첫 시집을 뉴욕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썼다. 그녀는 24세의 나이에 ‘맹인 소녀와 여러 시들’(1844년)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이 작은 책에 그녀의 모든 시는 아니지만 가장 훌륭한 시들이 들어있다. 31세에 그녀는 몬테레이 만과 다른 시들(1851)을 출간했고, 그리고 8년 후 ‘콜롬비아의 꽃 화환’을 출간했다. 그리고 이후, 그녀는 찬송가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찬송가는 또 다른 시의 형태였다. 그녀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일부는 1897년 출간된 그녀의 마지막 시집 ‘저녁 종소리’에 있었다. 패니는 결코 기록되지 않고 발견되지 못할 수도 있는 수 천편의 시를 썼다.

패니는 또한 자신의 찬송가 일부에 곡을 붙였다. 그녀가 피아노로 멜로디를 치는 동안, 서기가 그녀 옆에 앉아서 곡조를 기록했다. 패니가 무언가를 “썼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으로 시를 생각해서 그것을 적게 했다. 서기들은 그녀가 망설이거나 바꾸지도 않고 계속해서 시를 암송하는 능력에 놀라워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인생의 한 목표는 백 만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오늘 날 세계는 복음 전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축구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모든 교파의 목사들은 교회에 참석할 수 없거나 참석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TV를 사용한다. 눈먼 패니 크로스비는 거의 그런 시설이나 기술적인 이점이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백 만의 영혼을 찬송가와 선교 사역을 통해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녀의 94년 생애 대부분을 이 땅에서 발로 뛰며 그 일을 감당했다.

우리의 삶은 앨범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른 것과 옳은 것이 쓰여 진,
그리고 은혜로운 천사가
우리 세월의 페이지를 넘기네,
천사가 좋은 일을 읽으면 하나님은 미소로 답하고,
나쁜 일을 읽으면 눈물이 번지네!

비록 90세의 나이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쉬는 세월이지만, 패니 크로스비의 90세는 최고의 영적인 삶의 해였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의 진실한 포도주가 넘치는 풍부한 시간들이었다.

어느 해 10월 패니 크로스비는 지난 90년간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패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교회에는 수많은 군중들로 가득 찼다. 그녀는 장미꽃들로 가득한 작은 탁자에 섰고 그 꽃들을 만지면서 말했다.

“삶의 마지막 때에 당신들을 만나게 되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나는 황혼이 아닌 영원한 일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망의 별들이 지난 50년 동안보다 더 선명하게 지금 나의 가는 밤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시든 꽃이 아니며 오히려 부유함과 아름다움입니다. 소망은 항상 내 노래와 함께해왔으며, 내 인생의 빛은 오늘 밤에도 여전히 비치고 있습니다. 그 빛은 나의 아침을 비추었고, 낮의 왕성한 활동을 밝게 했으며, 그늘진 저녁시간을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변함없이 어렵고 힘든 인생을 위해 소망의 시를 써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예루살렘’(‘the Celestial City’-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Christian의 목적지)에 들어갈 때까지 소망의 사역을 수행할 것입니다.

나는 지난 90년 동안 많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갔습니다. 나는 볼 수 없었지만 손의 접촉과 목소리의 음색을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친구들과 동역자를 선택하는데 있어 거의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이와 함께 발전해갔습니다. 큰 호수의 일몰이나 큰 파도의 출렁임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오늘 밤 여기 해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장미꽃 향기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가볍게 부는 바다바람은 내 마음에 삶을 불러일으킵니다. 도시나 농촌에서,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성탄절 때 나의 방은 성탄절용 나무와 가지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에는 백합화, 장미와 함께 지냈을 것입니다.

90년 동안 나는 사람들과 항상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런 체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항상 밝은 모습을 만들어 가는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수년 전에 나는 어느 곳에서나 밝고 좋은 성격을 소유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과 사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성숙하고, 여유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습니다. 나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사랑하고 감사할 것이 많았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많은 슬픔들이 내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왔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 너머에서 들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영원한 빛의 땅인 감람산(Olivet, 마태복음 26:30)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50년 전보다 지금 더 많이 어린이들을 사랑합니다. 이 녀석들이 매우 편합니다. 오늘 이곳의 많은 어린이들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나는 항상 말합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세요. 패니 아주머니는 어린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라고요.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때로부터 내 시에 대한 대가로 첫 번째 수표를 받았을 때 나는 도울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손을 넓게 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90년 동안 나는 결코 사례를 위해 봉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항상 재정적인 결과에 구애함이 없이 하루 종일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단지 사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돈은 합당한 자리에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것은 땅에 강하게 쳐 박히는 가시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돈보다 돈 없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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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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