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물이 유행하는 이유
미치광이 과학교사가 실험체로 만들어낸 일종의 좀비 바이러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교에 퍼지게 됩니다. 감염된 이들로 인해 학교는 피로 물들게 되고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 되어버리죠. 학교에 고립된 아이들은 어른들이 와서 구해주기를 기다리며 좀비로 변해버린 친구들과 사투를 벌입니다.
또 한 편의 좀비물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근래 들어 좀비물이 유행하는 이유란,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당대의 불안감을 담아내기에 유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는 좀비라는 소재의 기원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요. 좀비 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경우에도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가 겪고 있던, 베트남 전쟁에 따른 불안과 공포, 그리고 인종 차별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노를 좀비라는 소재를 통해 은유한 바 있습니다.
좀비가 지닌 극도의 전염성과 감염에 대한 불안감은 <지금 우리 학교는>에도 반영되어 있는데요. 숙주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돌연변이 바이러스나 무증상감염자의 실재, 감염 확산을 두려워하는 지역주민 간의 갈등 등 익숙한 장면들은 초유의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노골적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를 표상하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빌려 우리네 학교의 민낯을 담아냅니다. 재앙의 시발점인 좀비 바이러스는 끔찍한 학교폭력으로부터 잉태된 것입니다. 좀비와 사투를 벌이는 친구들에게 ‘좀비가 힘든지 고3이 힘든지 꼭 살아남아 경험해 보라’는 대사는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우리 청소년들의 심경을 대변하려는 듯합니다. 친구도, 가족도 알아보지 못한 채 야성만 남아 교정을 떠도는 학생 좀비들의 모습은 오직 욕망을 위해 내달리게끔 떠밀리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딱한 처지를 연상케 합니다. 속물적인 교사들이 참혹하게 변을 당하는 장면은 보신주의에 젖은 교권에 대한 분노에 찬 비난으로 보입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급우를 노골적으로 깔보는 장면은 지금 한국사회의 계층 간 갈등을 여과 없이 묘사합니다. 어른들이 구조해 줄 거라 기대하지 않는 학생들의 대사는 이 사회에 대한 우리 청소년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내비칩니다.
작금의 흥행과는 별개로,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경솔하게 다루는 이 작품의 태도를 호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피해 학생들에 대한 적나라하고 선정적인 묘사는 연출 의도를 의심케 하고, 학교를 가리켜 ‘여긴 지옥’이라고 내뱉는 식의 대사를 통한 직설적인 메시지 전달방식은 촌스러워 보입니다. 일부러 부각시킨 듯한 몇몇 장면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그 사건’을 상기하려는 의도로 보이나, 그 민감한 사건이 좀비물이라는 상업영화의 장르와 올바르게 만났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렇듯 대한민국 학교, 나아가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담은 한 편의 우화라고 할 수 있을 <지금 우리 학교는>은 애꿎은(?) 대상을 웃음거리로 삼으려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냉소...?
좀비 바이러스를 만든 과학자는 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다가 일이 잘못되자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해치는데, 뚱딴지처럼 성경책으로 아들을 때려죽입니다. 성경책을 둔기로 사용해야 할 아무런 개연성이 없음에도 말이지요. 영화는 왜 하필 성경책인지 끝끝내 답하지 않습니다.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불안에 떠는 신도들을 향한 목사의 설교는 시쳇말로 ‘아무 말 잔치’에 가깝습니다. 신도들은 여기에 ‘아멘’으로 화답하죠. 이렇듯 개연성 없는 짓궂은 장면들은 기독교에 대한 조롱과 야유로 보입니다. 과학자의 아들이 친구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바닥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힘없이 아른거리는 형상의 십자가를 응시합니다. 이는 아마도 약자들이 고통받는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며 조소를 보내려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은 육체적 죽음과 함께 현실세계와는 이별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좀비들은 육체적으로 사실상 죽었을지라도, 영혼 없이 현실세계에서 유랑합니다. 이렇듯 좀비물은 사후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후세계를 희화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흉측하게 변해버린 좀비들의 외형이나 식욕만이 남아버린 게걸스러운 모습은 근엄함이나 진지함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취향에 부합하면서 전통적인 가르침을 존중하는 기독교를 향해 은근한 냉소를 보내곤 합니다.
전염병에 대한 불안,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 정신적 스승이 되지 못하는 종교, 이렇게 불편한 현실로 인해 현대인들의 분노는 누적되어 갑니다. 누적된 분노는 배출구를 찾기 마련이죠. 어쩌면 좀비물이 주는 살육의 쾌감, 잔혹성과 피 칠갑은 분노에 찬 현대인들에게 씁쓸한 도피처가 되는 건 아닐까요. 냉소적인 현대인들에게 기독교가 따스한 위로를 건네지 못한다면, ‘엄근진’(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것을 비꼬는 의미의 신조어)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추상같은 가르침이 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좀비물에 열광하지 않을런지요.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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