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5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아름다운 유산: 기도와 공공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에서 사회학과 역사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어떻게 불과 몇 세기 만에 예수 신앙이 로마제국 변방의 작은 공동체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는지 연구하였다”며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목숨까지 내놓은 채 소외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장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스타크가 제시한 기독교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아 준 것이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어느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환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성을 떠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스타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지 않고 남아서 전염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다”며 “많은 경우, 독감이나 다른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음식과 물, 목욕 같은 최소한의 돌봄만 받아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간호사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는 사이 병에 면역력이 생겼다. 스타크는 버려진 환자들이 회복되었을 때 목숨을 살려준 이들의 신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다시 전염병이 돌아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에도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로마인은 구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제는 신을 섬기는 일과 무관했던 것이다. 이방 신은 윤리적 요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윤리적 범죄를 벌하지도 않았다. 인간이 신의 심기를 건드릴 때는 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의례 기준을 어겼을 때”(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37~38)”라며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특히 이교도가 기독교의 삶의 강령 중에 낯설게 여긴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는 가르침과 실천이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대상은 믿는 가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교도들에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고 했다.
이어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Marcus Minucius Felix)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 중에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면서 그 원인을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며 “초기 기독교의 성장이 사회 안에서 건전한 삶의 방식의 결과였다는 기록은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초기 기독교는 교제와 나눔과 기도를 중요한 영적 실천으로 여겼다. 이런 실천들은 사회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기도하는 삶과 사회적 실천이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교도는 기도와 같은 의례와 사회적 실천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겼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생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가 사회적 삶의 실천으로 발전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은 기도의 실천을 ‘사물의 현상들 너머에서’ 존재하는 것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존재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Parker 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19)”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여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로의 참여와 실천을 위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단지 간청의 차원을 넘어 실존적, 경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도는 삶의 실천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이어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행동 또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넘어 행동 또한 성령과 소통하는 중요한 방식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충만한 삶으로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특정한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행동의 한 형태, 곧 표현과 발견과 재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진정한 기도는 세상 속에서 행동까지 그 지평을 확장시킨다. 특히 우리의 기도는 자비, 정의, 관대함 등과 같은 공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단지 자기욕구 실현이나 자기도취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의 생명력이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며 “생명력 있는 기도는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이 넘치고 성장하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가‘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정의를 위한 투쟁과 신적인 정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381), 사회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비인간적인 불평등에 눈을 감은 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니”라며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했다.
이어 “개신교 전통에서 공공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장 칼뱅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영적 공공선’과 ‘사회적 공공선’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22~30)”며 “막스 스텍하우스(Max Stackhouse)는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공공선을 지향한다고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 공적으로 선한 것인지, 무엇이 궁극적으로 선하고, 그 선이 어떻게 이 땅의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는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그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점점 다가오고 있으므로, 공공선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나라를 희망하며 살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또“진정한 기도는 공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공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이웃, 자연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세계에서 제 위치를 가지고 있다”며 “따라서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실제로 기도할 수 없다’(사이몬 찬, ‘영성신학’, 181). 존 애서턴(John Atherton)은 교회와 사회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신학은 생명을 밝히는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단순히 영적인 문제와 세상에 무관심한 하나님에 관한 좁은 이해로 전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 어떻게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John Atherton, Faith in the Nation, 136)”고 했다.
아울러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삶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개인의 욕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기도는 너무 협소한 기도 이해라고 할 수 있다”며 “진정한 기도는 건강한 사회적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공동선을 추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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