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한국교회 예배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의 갈등 중 하나는 찬양에 대한 것이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예배에 익숙한 1세대 성도들에게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록과 어려운 리듬의 찬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에게 경건과 엄숙함을 요구하는 점잖은 4부의 합창성가는 왠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약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 갈등은 정점에 있다. 교회를 비롯한 예배 공동체에 1세대 성도들과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7-80년대만 해도 드럼을 비롯한 전자 악기의 사용이 엄격했었는데, 최근 들어 드럼이 없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고 키보드를 비롯한 전자악기를 대부분의 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세월은 흘러 자연스럽게 젋은이들의 음악이 중심이 된 찬양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기에 과연 경건성과 거룩성을 추구한다는 목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음악과 악기들을 배척하는 것만으로는 예배 공동체 속에 함께하는 예배자로서 동질감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같은 예배 찬양과 교회 음악의 관점에서 갈등의 현안들을 살펴보자.

첫째, 주일예배 등의 공 예배에서는 반드시 찬송가만을 불러야하는가?

   전통적인 교회와 1세대 성도들에게 찬송가는 매우 익숙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 가치관 면에서도 ‘거룩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오랜 신앙의 관습에서 찬송가의 멜로디와 4성부에서 나오는 웅장함과 장엄함은 매혹적이며, 실제로 교회 음악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이든의 ‘천지 창조’와 헨델의 ‘메시야’ 등을 포함한 많은 곡들이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고양을 위해 쓰였다. 이러한 곡들이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신앙적인 충만을 위해서도 지금도 많이 나와야한다.

   하지만 ‘찬송가’만이 공예배에서 불려야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 우선 찬송가가 성경에 기록된 가사와 곡이라고 한다면 확고한 믿음이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공적으로 불리는 ‘찬송가’는 사실 우리가 정해놓은 하나의 규약과 같은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찬송가가 다르며, 교파마다 각 종류의 찬송가가 있다. 그것은 성경과 같은 진리가 아니며, 얼마 전 발간된 ‘새찬송가’의 최근 추가된 곡들은 선정위원들의 성격과 방향에 따라 선곡하였으며, 여러 면에서 전세대가 공감하기 어려운 평가가 많다.

   더 중요한 것은 찬송가의 성격과 내용이다. ‘새찬송가’에 추가된 많은 곡들이 한국의 작사 작곡자들의 새로운 곡이지만, 대부분 15세기 이후에 작곡되고 쓰였다.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룩성을 포함한 곡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곡들이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또한 지금 실려 있는 많은 찬송가가 사실은 전도나 간증 집회 등에 사용된 곡들이다. 그 내용들 중 상당수는 주일 공예배에 불려야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수직적인 찬양의 주제를 벗어났다. 물론 찬송가는 주일예배뿐 아니라 기도회 등 다양한 모임에도 필요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찬송가만이 주일예배에 사용되어야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찬송의 본질과 목적에 동떨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찬송가만이 주일 공예배에 사용되어야한다면 그 목적과 이유가 분명해야한다. 찬송가의 곡이 거룩하고 장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하는 것이다. 단지 오랜 전통이 있다고 해서, 익숙하다고 해서, 또는 부르기 쉽다고 해서 등은 근거가 약하다.

   반대로 지금 막 지어지고 불리는 찬양들이 경건치 못하고 내용이 세속적이며, 예배를 집중하지 못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이 아닌 이상, 찬송가만이 공예배에 불려야한다는 말은 예배와 찬양의 본질과 목적을 생각해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둘째, 예배와 찬양, 찬송, CCM, 복음송 워십(Worship) 등은 무엇이 다른가?

   예배의 의미를 나타내는 영어는 ‘워십(Worship)’이다. 워십(Worship)은 문맥에 따라 ‘예배’와 ‘찬양’ 또는 ‘경배’의 뜻으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워십(Worship)’은 문맥에 따라 ‘예배’와 ‘찬양’이 쓰여야하는데, 단어 사용의 빈도를 보면 대략 80%는 ‘예배’로 20% 정도는 ‘찬양’이나 ‘경배’로 사용된다.

   ‘찬송’은 찬송가로 쓰일 때는 4부 합창곡의 ‘힘(Hymn)’의 의미가 강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찬송’의 의미는 ‘찬양(praise)’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일부 ‘찬양’은 조금 세속적인 느낌인 것 같아 ‘찬송’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지만, 단지 선호와 느낌일 뿐이며 모두 같은 의미다.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동시대적인 기독교 음악의 통칭이다. 찬양 곡뿐 아니라 악기 연주 등을 포함한 말 그대로 총체적인 ‘크리스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CCM은 1980-90년대를 정점으로 교회와 크리스천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세속적인 음악 장르에 편입됐다. 아무래도 곡이나 가사가 세속적인 곡과 잘 구별되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원인중 하나다. 지금의 CCM은 크리스천 찬양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예배 음악과는 별개의 장르로 구분된다. 한국의 경우 CCM을 기반으로 사역하던 음악가들이 지금의 교회 예배 찬양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면서 과도기 시기를 지나고 있다. CCM 사역자임에도 자의반 타의반 예배 사역자로 혼용해서 부르다보니, 정체성에 어려움이 있으며, 교회 예배 찬양에도 구분이 되지 못하고 현실이다.

   물론 예배사역자와 CCM 사역자의 구분이 쉽진 않지만 앞으로 한국교회의 예배와 찬양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전문성을 세워나가기 위해 명확한 구분이 필요할 때다. 공연과 집회, 그리고 앨범 등을 통해 개인적인 아티스트로 사역하는 사람들은 ‘찬양 사역자’로 부르는 것이 좋다. 반면 ‘예배 사역자’는 지역 교회나 예배 공동체를 중심으로 찬양을 포함한 예배 전반에 영향을 주고 사역하는 사람들로 구분되는 것이 좋다.

   ‘찬양 사역자’는 개인의 창작곡이나 찬양곡들을 통해 감동을 주고 은혜를 나누는 것으로의 사명이 있다. 음악적인 기술과 이해, 전문성 등이 요구되며 대학이나 실용음악원 등의 학습이 필요하다. 한편 ‘예배 사역자’는 예배에서 찬양 인도를 통해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을 인도하거나 섬기면서 함께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게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찬양 사역자와 달리 예배 사역자는 찬양과 음악에 대한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이해뿐 아니라 반드시 성경적인 예배의 본질 이해와 예배신학의 기초에 관한 배움이 있어야한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 왜 찬양을 부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찬양 사역자의 개념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음악적인 역량을 가지고 찬양을 통해 감동을 주고 마음이 약하고 상심한 자들을 주님께로 이끌고 돕는 사역들이 필요하지만 예배 사역자의 방향과는 많이 다르다. 서구에서는 약 20여 년 전부터 CCM 기반의 찬양 사역자들과 교회와 예배 공동체 기반의 예배 사역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예배에 사용되는 찬양곡들을 ‘워십(Worship)’이라 부르고, 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른다. 반면 ‘찬양 사역자’들은 아티스트(Artist)로 집회나 공연, 앨범 중심의 사역을 하는데 대부분 ‘씨씨엠(CCM)’ 곡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예배 공동체의 예배와 찬양 인도를 위해서는 누구든 예배와 찬양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과 본질을 이해하고 인도해야한다는 것이다.

찬양인도

셋째, 주일 예배 등의 공예배에는 어떤 찬양을 불러야하는가?

   주일 예배 등의 공예배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곡, 즉 ‘수직적인 찬양(Vertical Worship)을 추천한다. 여기에는 찬송가 대부분의 곡이 해당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나 주관적인 주제의 곡들은 기도회에 사용되는 것을 추천한다.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의 하나님 한분만을 향한 공통된 방향과 경배의 목적에 부합하는 객관적인 찬양이 보다 많이 불려야한다.

   찬송가에는 보혈의 찬양을 비롯해 주일 공예배에 불릴 수 있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일부 곡들은 근대 시대에 부흥집회를 위해 만들어졌던 곡들로 세심한 주제 구분이 필요하다. 또한 최근에 작곡되고 지어진 곡들도 수준 높은 예배 곡들이 많다. 물론 찬송가의 역사만큼 오랜 검증이 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시간들이 역시 소중하다면, 좋은 곡들은 예배에 많이 사용되어야한다. 최근에 나온 곡들의 일부 찬양의 가사는 매우 복음적이며 성경적 예배와 찬양에 견주어도 좋을 만큼 수준이 높다. 최근 유행하는 리듬과 스타일이 쉽진 않지만, 배우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자세가 더 큰 은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반면 여러 선교단체, 패러처치(Para-Church) 등에서 많이 불리는 곡들을 무조건 선곡해 부르는 것은 지양해야한다. 인기 있는 곡일수록 다시 한번 검증해보고, 주일 공예배에 불릴 수 있는 내용들인지 인도자들은 기도하며 검토해야한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최근 유행하는 곡들을 무분별하게 주일 공예배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전통적 신앙 가치관을 가진 1세대 성도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진리로 결정하는 것이기에. 유행한다고 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한 후 선택하고 불러야한다.

   그러므로 예배 찬양 인도를 맡은 자들은 교회 직임에 관계없이 성경적인 예배와 찬양의 본질을 공부해야하며, 영적인 영향을 끼치는 선곡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해야한다. 신앙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지만, 예배나 찬양을 인도하는 사역자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영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하며, 겸손을 가지고 배워야한다. 교회 예배의 찬양은 1세대부터 나이가 어린 세대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에, 이를 모두 포함하는 찬양 인도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수직적인 찬양과 수평적인 찬양의 구분과 정의의 본질적인 기초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하며, 찬양 인도를 통해 일어나는 갈등들을 소화해내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찬양대와 찬양단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성가대라고 불리는 찬양대는 한국교회의 찬양의 중요한 부분을 유지해왔다.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오랫동안의 관습으로 ‘성가대’라고 부르는데, 새로운 교회나 예배 공동체에서는 ‘찬양대’라고 부르기를 추천하며, 개인적으로는 ‘찬양대’가 새번역 성경에 언급되었다. 찬양대는 성경 역대상과 느헤미야에 6번 나온다(대상 6:33, 15:19; 느 12:8, 31, 38, 40).

“찬양대에 속한,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 심벌즈를 치고”(대상 15:19)
“레위 사람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니야이고 그 가운데서 맛다니야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찬양대를 맡았다.”(느 12:8)

   예배에서 찬양대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발전을 해왔으며, 지금도 참여한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화음과 함께 은혜의 감동을 가져다준다. 반면 찬양단의 역사는 교회 역사를 생각할 때 매우 짧다. 찬양단은 대체로 몇 가지 현대적인 악기들로 인도자가 중심이 되어 주로 찬양을 인도한다. 몇 가지 상이한 관점들, 즉 찬양대는 클래식 악기와 발성법을 사용해 화음을 통해 찬양을 부르는 것이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찬양단은 대체로 드럼이나 전자악기를 중심으로 연주나 공연보다는 주로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인도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동안 한국교회에서는 찬양대와 찬양단의 갈등이 심심찮게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예배시간 앞에서 찬양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어 어느 정도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예배에서의 찬양이 원활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찬양대와 찬양이 하나가되어 찬양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다. 찬양대의 좌석을 예배단 뒤에 배치해 찬양단이 찬양을 인도할 때 함께 하나가 되어 찬양하는 모습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도 찬양대와 찬양단이 하나가되어 찬양하는 모습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리적인 결합에 걸맞게 화학적으로도 진정으로 하나가되는 모습이 필요하다. 아직도 전통을 중요시하는 많은 교회들에는 예식의 중요성에 가치를 두고 찬양대를 보수적인 입장에서 운영한다. 보수적이고 유교적 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변화가 느린 것은 이해하지만,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라면, 그 목적에 맞게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변해야할 때다.

   찬양대와 찬양단은 그 태생이 본질적으로 같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들로서 기능적인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고 해도 원칙적으로는 그 목적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최고의 찬양을 통해 영광 진리로 예배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한다. 이를 위해 교회 공동체 내에 찬양을 담당하는 모든 리더들이 함께 모이는 것으로 출발해야한다.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일수록 담임목사를 비롯해 찬양을 담당하는 사역자, 리더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 자리를 통해 서로 공유하며, 의견을 듣고 아름다운 찬양을 위해 열정을 다한다. 소통하지 않는 교회일수록 삐걱거리거나 갈등이 잠재해있을 수밖에 없다.

   만나고 소통하면서 그 다음으로는 예배와 찬양의 목적이 예배 공동체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나눌 필요가 있다. 각각의 교회와 예배 공동체는 그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찬양 또한 어떤 방향과 목적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충분히 검토하고 나눌 필요가 있다. 이 소통위에 기능적이고 실제적인 협력이 필요해진다.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단에 맞춰 찬양대가 어느 부분에서 화음을 넣고 크고 작게 부를 것인지, 또는 솔로로 참여할 부분은 무엇인지를 서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서로의 기득권과 권위를 주장하면 아름다운 찬양은 물 건너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도들 앞에 자주 서게 되는 찬양단과 찬양대는 자칫 교만해질 수 있는 여건이 풍부하다. ‘앞에 서는 만큼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겸손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매일 나를 쳐서 복종케 하지 않으면 우리를 자만하고 교만하게 만드는 사단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목적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은혜의 책임만큼 인격과 겸손, 그리고 감사의 고백이 넘쳐나야 한다. 그것은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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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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