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홀연히 나타난 미지의 존재로부터 당신은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가게 될 거라는 ‘고지’를 받은 자. 그 시간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난 지옥의 사자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합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이때 등장한 ‘새진리회’는 이 현상이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신의 형벌이자 선하게 살라는 엄중한 경고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고지를 받은 이들이 지옥의 사자들에게 당하는 끔찍한 장면을 ‘시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생중계합니다. 참혹한 시연을 목격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공포는 이내 집단적 광기로 확장됩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점차 새진리회의 주장에 설득당합니다. 이것은 신의 심판이며 심판을 당하는 사람은 그럴만한 죄를 지은 게 분명하다고 단정해 버리죠. 고지를 받은 이들과 그 가족에 대한 혐오는 집단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상황을 등에 업고 새진리회는 행정부 이상의 권력을 갖게 됩니다. 수장인 정진수는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죠.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인해 현실이 곧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괴팍한 신
사람들의 추측은 틀렸습니다. 신은 고지의 대상을 무작위로 선택했던 것이죠. 그 사람이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정진수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감추려 합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한 끔찍한 형벌을 두려워하면서 선하게 살아갈 테니까요. 진실을 알린다면 세상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심판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선하게 살 의지를 잃게 되고, 세상은 악이 창궐하는 아비규환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선보다 악을 좋아하지만
정진수는 심판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선으로 이끈다고 믿습니다. 마치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정확히 동전 가치만큼의 상품이 배출되듯이, 공포는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선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죠. 물론 죄에 대한 형벌이 죄를 억지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을 향한 본능적이고 선천적이며 보편적인 의식이 있습니다. 형벌을 통해 세워지는 정의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도덕적 양심 또한 인간사회를 지탱해 왔습니다. 그러니 신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면 세상이 지옥이 될 거라고 단정 짓는 쪽이나, 심판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선한 세상을 만들어낼 거라는 생각은 양자 모두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비관적입니다.
불가해한 현실 앞에 선 인간
<지옥>의 신은 괴팍합니다. 무작위로 심판을 하죠. 그러니 심판을 당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목도 모른 채 죽게 됩니다. 지옥의 사자들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벌을 받는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저 참혹하게 형벌을 집행할 뿐이지요. 심판의 시연과 당사자의 인생 간에는 아무런 도덕적 인과관계나 논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지, 그리고 그 고지를 당하는 이들의 고통이란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곤 하는 우리네 인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황당한 일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삶을 침범할 때, 현실은 우리에게 지옥이 됩니다. 불가항력적인 삶의 굴레에서 발버둥 치는 우리네 인생을 향해 ‘너희 삶이 곧 지옥 아니냐’고 영화는 넌지시 묻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지옥’이라는 단어는 중의적(重義的)입니다.
지옥 같은 현실
혐오와 조롱, 배제와 폭력이 난무하는 집단적 광기가 사회를 지배할 때 지옥은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장이 되어 버립니다. SNS나 1인 미디어는 고지받은 자를 지독한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조차 찾아볼 수 없죠. 이성이 붕괴되어 버린 곳에는 인간의 징글징글한 탐욕이 자리 잡게 됩니다. 한 인생의 끝장면이 영상물로 만들어져서 특정인들의 이익을 위해 유통되는 장면이나, 시연을 당한 장소가 성지가 되어 대중에게 소비되는 장면은 미디어 시대를 향한 풍자로 보입니다. 새진리회는 고지를 받은 여인에게 시연 당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도록 해 주면 엄청난 금액을 주겠다고 제안하는데요. 싱글맘인 그녀는 홀로 남겨질 어린 자녀들을 위해 이 끔찍한 일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이 일로 큰돈을 벌게 되었으니 자신에게는 행운이라면서요. 그녀의 모습은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손쉽게 파괴되어 버리는 현대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선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지옥>의 서사는 구약성경 욥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죄 없는 인간이었지만, 불현듯 들이닥친 재난과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죠(욥기 3:3). 가까운 친구들은 당신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게 아니냐며 욥을 질책합니다. 마치 <지옥>에서 고지받은 자를 향해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말이죠. 절규하는 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선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렇게 돌아가게 하시는가?’.
염세적이다... 하지만
<지옥>이 그려내는 음울한 디스토피아의 모습은 염세적이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의 태도가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희망을 나지막이 노래합니다. 사랑은 신의 선택을 거스르고 이웃 간의 연대는 거악에 맞설 힘이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건 우리 하나님은 지옥의 신처럼 괴팍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재미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우리 인생을 둘러싼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나쁜 일들로부터 많은 좋은 것들을 만들어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힘을 내서 사랑하고 연대하며 현실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현실이 지옥 같더라도 말이죠.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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