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교회(담임 이상학 목사)가 15~17일 본당 예배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삽시다’(롬12:2)라는 주제로 ‘2021 가을 부흥사경회’를 진행하고 있다. 강사로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은퇴목사가 나선다.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는 ‘혹시 집 나가고 싶으세요?’(눅15:25~32)라는 제목으로 이수영 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떤 주석가는 복음 속에 복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이라고 말한다”며 “그 만큼 오늘 본문은 복음의 진수를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순하면서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했다.
이어 “흔히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비유 말씀 안에 탕자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라며 “여기에 복음이 있다. 탕자는 곧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우리의 참 모습을 직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아버지의 곁을 떠난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과 그 죄를 가리킨다. 정말로 복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더 즐거운 삶이 다른 어디에 있는 줄로 아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알려준다”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 속에서 재물이나 세상의 부는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상에 예측할 수 없는 연화와 위협적인 힘 앞에서 결코 우리를 지켜줄 수 없고, 우리의 참 되고 지속적인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하며, 단지 일시적 연락과 죄적 삶의 도구가 될 뿐임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돼지를 치는 삯꾼이 되었지만, 돼지가 먹는 여물조차도 얻어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대인에게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졌고, 돼지 치는 일은 저주 받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탕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리와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며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삶이 좋은 것 같으나 곧, 자기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예적 삶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인간적 삶은커녕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어 “본문 20절 이하는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잊지 않으시고, 간절히 기다리시며,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옴을 그토록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아버지는 아들이 집 나간 이후부터 기다렸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언제 돌아올지 늘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신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은 용서와 화해의 표시”라고 덧붙였다.
또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길게 용서를 빌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왔는지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들의 입에 ‘품꾼’이라는 말을 올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며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수치를 원치 않았고, 그저 아들로서의 복권(復權)을 서둘렀다. 오히려 좋은 옷을 입힌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그리고 가락지와 신발을 신게 한다. 가락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위를 상징하며, 신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유함의 표시”라고 했다.
이 목사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누릴 수 있는 자유, 이것이 복음이다. 본문의 비유 말씀은 죄 지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유함과 자녀로서의 특권의 회복이 잘 드러난다”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내용을 말해준다. 이제 이 말씀이 누구를 향해 주어졌던 것인지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누가복음 15장 1~3절을 통해 율법을 잘 지킨다고 말하고, 의인임을 자처하며 세리와 죄인들을 격멸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의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찾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 따라서 그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함을 가르치는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맏아들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형식적·위선적이고, 비뚤어진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며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 그러나 함께 기뻐해야 할 자리, 그토록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앞에서 맏아들은 분을 내며 반항을 한다. 그리고 또 자신의 의에 대한 자만심이 가득하고, 기쁨과 감사가 없고 비판하길 좋아한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는 “본문 30절을 보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라고 했다. 맏아들의 이 짧은 한 마디를 눈여겨봐야 한다. 먼저, ‘이 아들’이라는 말에서 ‘내 동생’이 아니라 ‘이 아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나와는 상관없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맏아들은 자기와 동생 사이의 관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마저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즉각적인 결과로서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 단절을 초래했음을 가리키며, 이러한 단절된 상황 속에 계속 머물러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거부한다”며 “본문 32절은 불화와 단절 속에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화해와 일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또 하나의 화해, 즉 인간들 사이에 화해와 사랑은 오늘 본문의 중요한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또한 “본문 30절을 통해 맏아들 자신도 집을 나가 마음대로 놀고 싶은 충동이 그 자신을 지배하여 그의 매일의 삶은 온통 불만이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죽다 살아온 동생을 반길 수 없었으며,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기쁨 앞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탕자는 집을 나갔다 들어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집을 나가지 않았지만 마음과 생각이 집과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맏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다른 사람에 대해선 무관심하며,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용서할 줄 모르고 경멸하는 사람, 남을 정죄하길 잘하는 사람, 그러나 내심은 세속적 탐욕을 숨기고 있는 사람, 겉으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그의 말씀에 충실한 것 같으나 실상은 감사할 줄 모르고 기쁨이 없는 사람, 이것이 오늘의 비유 말씀 속에 맏아들을 통해서 보는 또 하나의 탕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아울러 “탕자는 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말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맏아들 또한 우리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이며 그에게 숨어 있는 탕자성이 바로 우리 안에도 숨어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며 “차라리 세상을 좋은 줄 알고 떠났다가 깨닫고 돌아온 탕자일망정, 하나님을 섬긴다하면서 속은 세상적 명예와 부귀, 권세, 영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사는 진짜 탕자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보는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두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