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사회학분야 신간도서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는 두 가지 책이 있다. 그 하나는 한국의 대표적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그의 학문적 연구생활을 총결산한 역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2021)이고, 다른 하나는 네델란드 역사학자이며 저널리스트인 브레흐만(Ruger Bregman)이 쓴 『휴먼카인드』(인플루엔셜, 2021)이다. 위 두 가지 신간서적은 집필동기가 다르지만, 독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본성은 과연 이기적이고 죄악적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평생 신학교육계에서 가르친다는 소명감으로 일해왔고, 교회법상 겸직금지이기 때문에 전담 담임목사 직무는 맡지 않았지만 안수 받은 목사로서 교회강단에서 설교를 많이 해왔다. 현재는 은퇴교수와 목사로서(82) 개인적 삶을 조용히 정리하는 단계이지만, 한 가지 근본적 물음을 내 자신 에게 되묻고 있다: "내가 신학교육에서 가르쳤고, 설교강단에서 설교할 때, 너무 지나치게 인간본성을 어둡고, 이기적이고, 병든 존재로서 곧 '타락된 인간본성'으로서 강조해왔던 것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 받았다는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를 기독교의 원죄론에 압도당하여 제대로 선포하지 못해온 것 아닌가?"
이번에 쓰는 필자의 신학칼럼주제는 그 문제를 솔직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줄여말하면 기독교의 인간이해에서, 학문적으로 말하면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본성을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을 더 많이 강조해온 이유와 그 해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성찰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의 제1급의 인문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 종교철학자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서구문명의 기틀을 터놓은 인간본성에 대한 잘못된 오해 혹은 이념적 독단론이 오늘날 인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지나친 갈등, 분열, 억압구조, 그리고 강제화된 비인간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깊은 성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의 신학계와 목회일선의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자기성찰의 기미가 뚜렷이 감지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2. 부정적 인간본성론의 근거로서 성경과 서구 기독교사의 고찰
서양기독교 문명사회와 그 선교 영향 아래 있는 한국 같은 피선교 국가 교계풍토에서 인간본성에 대한 부정적 생각은 기독교가 '신성한 경전'으로 삼는 성경 여러 군데 증언에서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래 몇 군데 대표적인 성경구절 예를 들어본다.
(i)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
(ii)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iii)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51:5)
(iv)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자요, 비방하는 자요....(롬1:28-29)
(v)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이상에서 몇 군데 사례를 성경구절에서 보았지만 더 이상의 성구나열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음 받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았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창2:26-31) 인간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리고, 창세기 기자는 제2장에서 아담-이브의 타락설화(창3장), 곧이어 제4장에서 가인-아벨의 형제살인 설화(창4장)를 다룬 이후, 성경은 줄곧 인간본성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악한 기질과 죄악을 저지르는 존재라고 고발하고 있다. 성구사전(聖句辭典)을 보면 악 혹은 악행에 관련된 언급의 성경구절이 약 500회 이상이다.
이렇게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서 인간본성을 부정적으로, 심각한 병든 모습으로, 속죄받고 치유받아 새롭게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로서 거듭나기 전에는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탐욕과 욕정의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2000년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어거스틴-루터와 칼빈-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에 이르기까지 인간본성에 관한 견해의 기본틀을 제공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제1권 제7장 '유아기의 죄악' 제목에서 젖먹는 어린 유아기부터 죄성이 나타난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동시대의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가 주장하는 인간본성이 지닌 선악에 관하여 자유로운 선택결정 능력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고 인간본성의 전적 타락설과 신의 절대은총론을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당시 저명한 인문주의자였던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론에 대하여 '노예의지론'을 주장하여 어거스틴의 입장에 동의한 것이다. 루터는 "인간에 대한 토론"(1536년) 논문에서 인간 이성능력의 불완전성, 인간본성의 부패성, 선한 뜻을 이루려는 자유의지가 아담의 타락이후 능력상 없다고 주장하였다.(지원용, 『루터의 사상』, p291-294)
요한 칼빈도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제2권 제1장 '인류의 타락과 원죄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신앙이 타락의 뿌리였다. 그 이후로 야망, 교만, 감사치 않음이 더불어 일어났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댕이치고 혈육적 정욕과 그칠 줄 모르는 탐욕(concupiscence)으로 인간본성은 부패되어 버렸다. 인간본성의 죄성이 지닌 이 부패성을 '원죄'라 부르며...." 죄의 오염은 모방으로 말미암는 가벼운 현상이 아니고 모태로부터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20세기 초 유럽 개신교 신학계에서 일어났던 저 유명한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사이의 '자연신학 논쟁'은 엄격하게 말해서 인간본성론에 관한 논쟁은 아니었다. 그 자연신학논쟁은 "신 인식 가능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락했더라도 인간이 송아지나 바위덩어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적 은총의 사건과 말씀에 답하는 응답성(responsbility)이 남아있느냐의 문제였다. 에밀 부룬너는 그 능력이 인간 이성능력이든지, 도덕적 책임성이든지, 양심의 가책이든지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는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유명한 <아니야!, Nein!>이라고 주장했다. 초기 칼 바르트는 인간본성 속에 어떤 형태의 종교적 선험성이나 신인식의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초기 칼 바르트는 인간본성의 죄성에 대하여 어거스틴-루터-칼빈의 견해를 따른 셈이다. 미국의 20세기 기독교신학계가 낳은 저명한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중심 사상 속에 흐르는 인간본성에 관한 견해도 비관적이다, 인간심성 깊은 곳엔 자기중심적 이기심, 교만, 탐심 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왜 기독교의 걸출한 신학자들은 인간본성에 관해서 비관적 견해를 공통적으로 피력한 것일까? 우리기 그들의 비관적 견해에 대하여 기독교의 굳어진 교리나, 성경문자주의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너무나 쉽게 신학자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인간본성은 원죄로 인해 타락되어 그 본질상 부패 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의지활동도 '노예의지'라는 지독한 언어로까지 부정적 표현 한 이유를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첫째, 신학자 개인의 구체적이고도 실존적 체험에 정직했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주류적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의 예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는 기독교 진리 안에서 빛, 생명, 중생체험하기 이전까지는 마니교와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그의 생각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 자신의 젊은 시절 생물학적 성욕과 야심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했던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다.
둘째, 마틴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도 그들의 실존적 내면의 깊이, 영혼의 깊이를 통찰할 때 그들은 인간 실존상태가 인간마음의 깊은 곳 까지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같은 눈 앞에서 "나는 깨끗하고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하다고 설수 없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종교개혁당시는 현대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 이론이 아직 발달하기 이전이었지만, 루터와 칼빈은 이미 인간의 지성, 이성, 의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맹목적 위력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깨달을수록,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는 무수히 많은 인간본성에 대한 죄성 강조를 연구할수록, 인간본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기울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설은 인간자신의 스스로 자기구원과 윤리 도덕적 죄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20세기 이후 현대 신학자들 중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를 예로 들었지만, 그들은 왜 인간본성에 대하여 그토록 비관적 견해를 지녔던가? 현대 신학자들은 혈육적 자연인간 본성이 현대판 이념적 우상숭배 제작의 근본원인이라고 본것이다.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 인종차별, 노예사냥, 국가 간 전쟁과 합리화시키는 집단 살육 등등 모든 20세기 비극은 인간본성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인간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불신앙, 자기중심적 이기심, 자신을 생명동산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휴뷰리스), 약육강식과 자연선택이라는 생물진화론의 무자비한 법칙을 인간사회에도 적용시킨 잘못된 사회진화론자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수탈 등등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 신학자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도 19세기 유럽 기독교를 풍미했던 "기독교적 부르주아의 인간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왜 정통기독교의 주류적 신학경향이 인간본성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졌던 것인가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인간본성 안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부정적 경향성들, 특별히 자기중심적 이기심, 남을 지배하려드는 권력의지 경향성, 실전적 이성과 지성의 당파적 굴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식 중심철학,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을 정당시하는 생물학적 인간관 신뢰 등을 직면할 때, 기독교가 인간본성에 대한 세속주의적 낙관론에 경고와 비판을 가한 것에는 영원한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지나친 원죄론이나 인간본성에 대한 '성악설적'(性惡說的) 비관주의가 지나치게 편향적이었고 부정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예수 복음서에서 확인되는 예수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격려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는 민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격려하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b)고 격려하기 때문이다.
3. 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과 브레흐만의 '인류'(휴먼카인드)의 진지한 질문
이글 서두에서 소개한 최근에 한국 서점에서 주목받는 두 책, 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과 브레흐만의 『휴먼 카인드』는 지난 인류 역사, 특히 2000년 서구 기독교 문명사와 지구촌을 오늘날도 지배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해가 과연 보통 사람들의 삶의 경험에서 정당하고 사실인가를 되묻고 있다. "인간본성이 모두 선한 것이다"라는 단순한 '인간본성의 성선설'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길희성에 의하면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본성 속에 지워버릴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그 신비하고도 미묘한 경향성과 씨앗같은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고 강렬하게 되묻는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불성 혹은 여래장' 이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양지(良知) 혹은 본연지심'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시대마다 부침하는 인류정사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시대이념이 아니고, 수 천년 인류문명사와 사상사와 종교사가 증언하는 '오래되고 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부정 할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 속에 하나님의 씨, 신성한 불꽃, 거룩함을 지향하려는 갈망, 설혹 온전하지는 못할 지라도 선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일을 하고픈 착한 마음이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그 신비한 인간본성의 지워버리거나 아예 없다고 부정 못하는 그 귀중한 인간성의 '밭에 감추인 보화'(마13:44)를 기존의 정통신학과 목회설교는 무자비하게 짓밟고, 없다고 부정하고, 쓰레기더미 속에 던져넣지 않았는지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브레흐만은 본래 전공이 네델란드 유트레흐트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다. 그러나 역사학에 머물지 않고 정치경제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현대진화생물학 등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휴먼카인드』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호모사피엔스가 진화과정에서 출현한 때는 20만 년 전인데, 그 중 19만 년 동안은 거의 집단 이주를 하면서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통상 초기 인류조상들은 골릴라나 침팬지를 닮은 원시인들이고 현대문명인보다 더 야수적 본성을 지닌 공격적 존재라고 상상하지만 과학적 증거자료들은 그들은 현대인들보다 서로 우호적이고, 협동적이고,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에게서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배타성, 타자에 대한 지배욕망, 공격성과 전쟁, 인종 차별 등등 바람직하지 않은 집단 심리현상이 나타난 것은 농업위주의 문명이 출현하고, 국가제도가 발생하고, 화폐와 종교제도와 문화겉치장이 발전하면서부터 생긴 비본질적 경향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본성은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악하므로 절제, 견제, 규제, 강제, 길들이기,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집단은 정치, 경제, 언론, 종교분야의 지배그룹이었다고 강조한다.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 인류사회는 인간본성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철학적 캠프로 양분되었다. 그 하나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캠프 사상가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캠프에 속한 사상가들 집단이다.
전자 곧 홉스군단에서는 인간본성상 그대로 방치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태가 된다고 주장한다. 후자, 곧 루소군단에서는 인간본성은 천성적으로 선량한 존재인데, 문명이라는 제도가 덧씌워 지면서 악한 존재라고 보게 되었고 그러한 경향성은 국민국가의 법 지배, 사유재산을 지키고 확대하려는 욕망, 그리고 사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뉴스만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언론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가장 진보적 제도이면서 인간 본성에 맞는 제도라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시장경제 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삼권분립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제도, 법 앞에 평등을 말하는 법치주의와 과료제도는 사실 알고보면 인간본성에 대한 토마스 홉스 견해를 뒷받침하는 제도인 것이다.
토마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로 대표되는 인간본성론에 관한 두 입장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그들보다 거의 800년 혹은 1000년 전에 중국 춘추전국시대(BC 770-BC.221) 제자백가의 논쟁 속에서 이미 논의 되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전국시대의 순자(BC 298-238)는 성악설을 주장했고, 맹자(BC 372-289)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인간본성에는 생득적인 선한 본성이 씨앗으로서 사단(四端: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맹자가 인간본성이 온통 선하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스스로 부끄럽다는 마음, 배려하고 사양하는 예의 바른 마음,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정의로운 마음씨의 맹아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들을 무시하거나 꺽어버리거나 방치하지 말고 기르고 온전하게 꽃피우도록 교육을 통해, 수행을 통해 발현시키자는 주장이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토마스 홉스나 루소보다는 맹자의 견해에 주목한다.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한 호모사피엔스 인류종이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힘겨운 노력을 하는 가운데 속에서도, 차가운 날씨 속에서 매화꽃이 피어난 것처럼, 인간 마음 속에 맹자가 말하는 4가지 맹아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와 지구상의 생물진화를 '우연과 필연'에 방치하지 않고 '정향진화'(定向進化)시켜 가신다는 신앙고백에 대한 진화론적 증거라고 보고싶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진화한 고등동물 호모종의 하나인 호모사피엔스이지만, 그 영혼 속에 진선미를 추구해가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현(體現)해가는 피조물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형상'을 구체적으로 인류 속에서 체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原型)이라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이다(고후4:4, 골1:15).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닮아감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영적 휴머니즘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모든 보편적 일반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체현해 가야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복음이 아닐까?
이제 기독교 신학자와 설교자는 인간의 원죄설과 죄성을 강조하여 더욱더 인간을 비참하고 무능력한 존재라고 몰아가는 메시지를 중지하고, 보다 선량한 존재라고 격려하고 비전을 보여주는 긍정적 메시지를 말해야 하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그것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의 '인간본성에 관한 신학적 전회(轉回)요 회개'를 의미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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