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한국이 2일 저녁 ‘나의 이웃과 지구를 위한 참 좋은 선택’이라는 주제로 11월 랜선 청년캠프를 개최했다. 이날 황성준 위원(前 문화일보 논설위원)이 간증을 전했다.
황 위원은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으로 입학할 당시의 스산했던 학교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광주 민주화의 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법경찰들이 학교 안에 들어와 있었고, 선배들은 계속 데모를 하고 있어서 고민이 생겼다. 교회 청년부 선배나 담당 전도사님께 상담하면 데모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틀렸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다치니까 나중에 하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었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은 세 종류로 바뀌어 갔다. 첫 번째는 주일날 예배는 드리지만, 학교생활에선 일반 대학생과 전혀 다른 게 없는 적당한 세속주의, 두 번째는 교회를 운동권의 장으로 생각하는 교회 도구주의, 세 번째는 자기들끼리 신앙생활을 하는 고립주의 그룹이었다. 고립주의는 본인의 신앙심을 지키는데는 좋았지만 비주류로 전락해버렸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갈 때 학생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황 위원이 운동권이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그는 “데모하다 도망쳐 온 학생들을 잡으러 사법경찰과 전경대가 강의실 건물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저도 엉겁결에 난투극에 참여하고 도망가게 되었다. 그날 저녁 도망갔던 친구들과 허름한 중국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연행되었다. 당시 몇 명은 소위 말하는 강제징집을 당했고,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다음 날 나오게 되었다. 나오면서 이놈의 세상하고는 한 하늘 아래서 못 살겠다는 마음에 얼마 안 되어 운동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나의 계기였지 운동권에 들어가게 된 실질적인 문제는 삶의 의미의 문제였다. 고등학교 때 삶의 목표는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들어갔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주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여러 과목을 들어도 지적갈등과 마음의 갈등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런데 운동권에 접해서 소위 말하는 학습을 했다. 속된 말로 극렬한 운동권, 솔직히 말해서 막시스트-레니니스트 일반적인 용어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며 “공산혁명을 하자면서 뛰어다녔다”고 했다.
그는 “그나마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 중에서 좋은 국가는 당시 소련이라고 생각했다. 구로공단, 선반공 생활, 자동차 조립도 하다가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소련을 들락거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소련에 갔을 때 환상하고 조금 달랐지만 환상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대접하는 외국인 호텔에서 잠깐 지내며 좋은 걸 보고 다녔기에 경제적으로는 생각보다 열악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황 위원은 91년부터 소련에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생의 두 번째 반전을 맞이했다고 했다. 그는 “인생의 첫 번째 반전이 대학에 들어와서 신은 없다고 선언하고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다면, 두 번째 반전은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청천벽력같았다. 다행히 국립대학의 한국어 교원이 되어서 그럭저럭 생존은 가능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거기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은 배급표가 있었는데, 배급제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왔다. 달걀 10알, 돼지고기 250g 등 이 적힌 배급표가 있어도 물건이 없으면 배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엔 할머니들이 가족들의 배급표와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다가 물건이 나오면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곤 했다. 우연히 지나가다 줄을 섰는데 달걀 배급 줄이었다. 줄이 길어서 달걀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을 했는데 받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 뒤로 계란을 못 받은 할머니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저항해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저항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셨다.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한 달 동안 계란은 못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면서 측은지심이 들어야 하는데 나는 받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했다.
이어 “숙소에 돌아갔는데,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냐면 그 정도 깨졌으면 공산주의가 틀렸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탈린적인 관료주의가 잘못된 것이지 이상으로서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어린 나이에 몇 가지 책을 읽고 내가 신과 같은 영역에 들어서서 인간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형테가 바로 막스레닌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과학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내 안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남아 있었다”라고 했다.
이어 “이상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왜 잘못되엇을까? 소련경제가 왜 깨졌을까?를 고민하며 경제학부에 들어가 소련경제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권유로 하이에크의 저서 ‘치명적 자만’을 읽고 굉장히 지적인 충격을 받아서 박사학위 준비 논문을 벽난로에 불질러 버렸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이론적으로 파산했음을 느꼈다”고 했다.
황 위원은 “교원으로 받는 월급이 한 달에 50달러였다. 배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돈으로 생존이 힘들어서 전쟁기자를 하게 되었다. 기자라는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저는 아주 강한 니체적 허무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미적지근하게 교회를 다니다가 고3 때 원하는 대학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대학에 와서는 신앙을 다 버리고 신은 없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면서 가짜 신 공산주의를 섬겼다. 인간의 힘으로 바벨탑을 쌓고 유토피아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미친 듯이 뛰었는데 이게 파산해버리니 남는 건 허무였다. 전쟁기자를 하다 보면 많이 죽는데 총알을 맞아서 죽는 게 아니다. 무정부 상황에서 외신기자들의 금품을 노린 강도들에게 당해서 많이 죽었다. 이러면서 인간이 뭔가 고민하게 되고 주변의 전쟁기자들을 보면 극단적인 니체철학주의자들이 많았다. 전쟁기자들 대부분이 마약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부터 피우고 술을 먹었다.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데 먼지로 돌아가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저의 국내 문제가 풀리면서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되었다. 특파원 시절 한 평신도 선교사님이 저를 전도하려고 찾아오셨다. 저를 계속 쫓아다니셔서 교회에 가게 되었지만 대충 졸면서 다녔던 것 같다. 선교사님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며 성경 공부를 권하셔서 참석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울리기 힘들었다. 선교사님은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저에게 성경책을 읽어보라며 선물해주셨는데 그것도 조금 읽다가 접었다. 그러던 중 아프가니스탄을 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마어마하게 잔인할 걸 봤다. 아프가니스탄을 빠져 나와서 시골 여관 같은 곳에서 사흘간 먹고 잠만 잤다. 그러니 굉장한 허무가 몰려왔다”고 했다.
이어 “삶의 목적도 없이 인생을 살아서 뭐 하냐는 생각이 밀려오는데 선교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만 읽었다. 읽다가 너무 지치면 쓰러져서 잠깐 졸다가 너무 배고프면 빵을 먹으면서 성경책만 읽었다. 그러다가 신명기를 읽으면서 무너졌다. 하나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데, 나 같은 죄인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계속 읽다가 요한복음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예수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펑펑 울며 회개했다. 기도하는 요령도 모른 채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 같은 죄인은 의롭게 될 수 없고 예수님이 구원해주셔야 한다는 게 제 신앙고백”이라며 인생의 세 번째 전환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 이후로 엎어질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네가 나를 부인한다면 나도 너를 부인할 거라는 말씀이 있다. 내가 부인하지 않았지만 증거하지 않았구나를 깨닫고 최근에 크리스천이라는 선언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짧은 머리로 이 세상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다는 바벨탑적인 사고, 신을 버리고 살다가 결국 과학과 이성에 대한 과대한 확신으로 인해서 비현상적인 현실을 보지 못했다. 영적인 눈이 생기니까 진정한 리얼리티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황 위원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게 하나 있다. 운동권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이 저를 보면 굉장히 놀라는 게 있다. 제가 그렇게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전에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었기에 인상을 쓰고 다녔다. 요즘은 실없는 사람처럼 방글거리고 다닌다. 하나님을 모를 때 웃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웃음을 회복하고 기쁨을 찾은 것이다. 신을 대처해서 세속주의로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병든 영혼들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확실성을 찾고자 특정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영혼을 팔아버리는 현상에서 벗어나서 참된 신, 사랑의 하나님을 찾으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기쁨을 찾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회과학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왜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자가 되는가? 첫 번째는 엉터리 지식인들의 문제인데, 인간의 사회구조를 자기가 다 이해하고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하는 지적 교만이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하는데 결국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향유가 있다. 참된 공동체는 신앙의 공동체 혹은 가족인데, 이게 무너졌을 때 거짓공동체가 들어오는 것이다. 건전한 가족이지만 대화가 없고 세대가 서로 이해를 못 하면 깨진 것이다. 이러한 참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분명한 건 신이 없이 어떻게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폭주할 수 있고 폭주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잘 믿던 사람도 대학에 가서 무너지는데, 요즘 기독교 교리와 세계관에 대해서 무감각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과 맞서야 하는데 너무 도피하는 것 같다. 때로는 그들과 맞서서 영적인 전쟁을 준비시켜야 하는데, 이점에 너무 소홀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며 세속 따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 따로 가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젊은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하기보다 한국교회가 삶의 의미를 줘야 한다. 세상 문제를 이야기하면 관심 갖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잘못하면 젊은이들에게 회피하는 말로만 들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간은 죄성을 가진 존재이고, 그 바탕에서 사회과학도 다 설명할 수 있다. 지금 인본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부정한다. 진짜 참된 아버지라면 아들이 잘못하면 야단쳐야 하듯이 죄성을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은 꾸짖지 않고 달콤한 말로만 위로한다. 사회과학 좌익적인 이론이 왜 존재하는가. 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고, 세상이 잘못했으니 세상을 깨면 된다고 한다. 얼마나 달콤한가. 성적인 타락도 죄가 어디 있냐고 그냥 즐기라고 아부를 한다. 아부하지 않고 때론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꾸짖으려면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메신저를 상실했다. 한국교회가 올바른 메신저로서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 같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무조건 정죄하자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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