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추운 날, 두 친구가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 친구가 뒤늦게 도착해서 막 가게로 들어서려는데, 술집 입구에서 꽃을 팔던 할머니가 다가왔다.
“신사 양반, 꽃 좀 사줘요.”
“이렇게 추운데 왜 꽃을 팔고 계세요?”
“우리 손녀가 아픈데 약값이 없어서 그래요. 꽃을 팔아야만 손녀딸의 약을 살 수 있다오.”
[2]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는, 할머니가 말씀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꽃을 샀다. 꽃을 들고 술집으로 들어서자, 친구가 꽃장수 할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그 꽃, 저 할머니한테 샀지?”
“어떻게 알았어?”
“저 할머니 사기꾼이야. 저 할머니 저기에서 항상 손녀딸 아프다면서 꽃 팔거든.
그런데 저 할머니, 아예 손녀딸이 없어.”
[3] 그러자 속았다며 화를 낼 줄 알았던 그 친구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진짜야? 손녀가 없어? 그러면 저 할머니 손녀딸 안 아픈 거네. 정말 다행이다, 친구야, 한 잔 하자. 건배!” 일본의 CF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4] 한 달에 13번 월급 받는 국내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가 쓴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책에 나오는 한 내용이다. 이 가슴 훈훈한 감동적인 얘기 하나에 필이 꽂혀서 거금 14,800원을 주고 책을 샀다. 서점에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서 계산대에 가기까지 수없는 선택의 갈등을 한다. 심지어 계산대에 가는 중에 내려놓는 책도 3분의 1이나 된다. 하지만 내 손에 최종 선택되어 계산 후 집으로 함께 동행하는 책은 그야말로 최고의 내용이라 보면 된다.
[5] 내가 왜 저 책을 골랐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의 다른 내용은 별 볼 게 없었지만 위에 소개한 스토리에 나오는 한 친구의 밝고 훈훈한 마음 하나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예기치 못한 반전 스토리에 놀라고 남의 할머니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마음씨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웬만하면 속았다고 화를 내면서 꽃을 도로 갖다 주고 돈을 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6] 꼭 그러지 않더라도 꽃을 내팽개치면서 할머니를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러지 않고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 따뜻한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게 바로 ‘예수의 마음’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나를 생각해보았다. 요즘 우리는 너무도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남을 허물을 용납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너무 인색하다. 그만큼 많이 속아봤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7] 자고 일어나면 우리를 속이려는 세력들에 우리는 많이 노출되어 있다. 매스컴이 우리를 속이고 광고들이 우리를 속이고 정치인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 심지어 가족이나 형제들한테도 속임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니 더욱 마음이 인색하여 움츠러들고 인간미 넘치는 스토리 또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남다른 배려와 통 큰 마음을 베풀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8]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배려란 제비꽃이 자기를 밟고 지나가는 발뒤꿈치에다 향기를 남기는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뒤적이다 발견한 금쪽같은 한 문장이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새겨놓고 언제든 떠올리는 소중한 한 구절이 되고 말았다.
보통의 경우엔 나를 밟고 지나가는 발뒤꿈치에다 저주와 욕설을 남긴다. 하지만 제비꽃은 자기를 밟고 억누르고 왕따시키고 파멸시킨 발뒤꿈치에다 향기를 남긴다고 했다.
[9]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비꽃이 향기를 남기려고 애써서 그리 된 게 아니다. 향기 그 자체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향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가? 내가 향기라면 자동 향기를 남길 수밖에 없다. 향기가 없기 때문에 향기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
‘Doing’ 이전에 ‘Being’이 중요하다.
[10] ‘존재의 알맹이’가 있으면 ‘행함이란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Being’이 아닌데 억지 ‘Doing’은 나올 수 없다. ‘Being’이 갖춰지면 ‘Doing’은 자동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고후 2:14-1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1] 그렇다. 우리는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도록 창조된 그리스도의 향기들이다. 향기라면 반드시 냄새를 풍겨야 한다. 무슨 냄새 말인가? 그리스도의 냄새 말이다.
지금 우리 기독교는 각박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못해서 개독교 소리를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참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이 어떤 부류인지를 용서와 용납과 배려란 열매를 통해 마음껏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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